핼러윈 데이에 길을 잃다
그때,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으니 충분히 놀았고 집에 돌아갔으면 했다. 핼러윈 데이가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괴기스러운 분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술집에서도 각종 핼러윈 장식을 해 두고 있어서 분위기가 술을 부르긴 했다.
친구의 2차 권유를 뿌리치지 못했다. 그게 패턴이 있고 항상 난 속고 있었다. 두세 병의 맥주병이 쌓여서 추가 주문을 할지 이제 일어서서 갈지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오면 그 친구가 꼭 하는 말이 있다. 그 말을 들으면 항상 나는 흥분하고 맥주병이 더 쌓여 가게 된다. 아무튼, 이건 그렇다.
2차로 간 술집은 바니걸스 복장을 하고 있는데 하얀색 바니걸스다. 본 적 있나? 하얀 바니걸스. 하얀 바니걸스 들의 어색한 시중을 받으며 맥주를 마셨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다 자리를 뜨고 급기야 하얀 바니걸스 들도 하나같이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쌩하고 퇴근해 버린 후라 우리는 마지막 손님이 되었다. 드디어 마지막 잔을 비웠다고 생각하는 순간 친구가 의연하게 뒤에 숨겨져 있던 하이네켄 한 병을 꺼냈다. 그것도 큰 병으로. 웨이터가 마지막 오더라며 종을 치며 다닐 때 술이 남아 있음에도 미리 주문해 둔 것이다. 그 마지막 하이네 캔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나는 더 마시지 않았고 술집 주인은 더는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인제 그만 문을 닫아야겠다고 선언했다. 태국 맥주는 김이 빠지지 않는다는 희한한 논리를 내세우며 하이네 캔을 냅킨으로 틀어막고 친구는 일어섰다. 그리고 헤어진 건. 새벽 두 시 반.
친구들은 나를 남겨두고 반대 방향으로 스쿠터를 타고 안녕을 외치면서 가버렸다. 삼십 분이 넘었지만 썽태우는 물론 툭툭이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 집 방향으로 걸었다. 두 번이나 걸어봐서 아는데 이 길을 걸을 수는 있지만, 무척 멀다. 차로 십 분이면 가겠지만 걸으면 한 시간이다. 그곳은 조금 더 떨어져 있고 늦은 밤이니 빨리 걸어도 두 시간은 가야 한다. 아무튼, 집 방향으로 걸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치앙마이 대학 정문이다. 어두운 밤이었고 걷다 뭔가 있으면 잡아타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미 치앙마이 정문이니 안 들어갈 수 없었다. 새벽 세 시가 훌쩍 넘은 치앙마이 대학 정문에 경비원들도 자고 있었다. 태국에서 두 번째 크다는 치앙마이 대학. 서 있던 곳은 정문. 가야 할 곳은 후문. 가다가 차가 오면 잡아타더라도 일단은 걸어야 했다.
치앙마이 대학 정문과 후문 사이에는 커다란 탑이 있는 로터리가 있다. 그 로터리를 보고 곧바로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밤이 늦었고 가로등도 거의 다 꺼진 상태였다. 계속 걸어 들어갔는데 이 길이 아니었다. 스마트폰에 지도를 켜고 현재 위치를 봤다. 후문 방향에서 90도 틀어진 치앙마이동물원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위치를 표시한 후 바로 휴대전화기가 꺼졌다. 배터리가 다 됐다.
다시 왔던 길을 걸어서 되돌아 나오는데 개들이 짓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온다. 내가 개들이 있는 쪽으로 가기도 했겠지만, 개들도 분명 내게로 오고 있었다. 새벽 네 시의 치앙마이 대학 캠퍼스는 단과대학마다 학생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각 단과대학을 지키는 개들의 각축장이었다. 공대 개들이 셀 것 같지만, 농대 개들의 숫자에는 못 당할 것 같다든지. 하여간 엄청난 크기의 개 대학이었다.(뭔가 다른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 다른 방향으로 가면 또 다른 개들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다. ‘아. 이 방향으로는 못 가겠구나.’ 개들이 짓는 방향을 뒤로하고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거의 새벽이 다 되어 가는데 오래 걸어서 온몸이 땀에 절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이제 나는 완전히 방향을 잃고 계속 처음 보는 건물들 사이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눈앞에 어떤 사람이 스쿠터에 앉아 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몇 시간 만에 개들 이외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다가가 물었다.
“랑머처(치앙마이 대학 후문)”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컴 위드 미”라고 하며 스쿠터 뒷자리를 가리켰다. ‘go’건 ‘come’이건. 아무튼, 알아들었다.
그와 함께 대학 캠퍼스를 달렸다. 한참을 달렸다. 그 한참의 거리를 걸었다면 정말 오래 걸렸을 것이고 아마 해가 뜨는 것을 캠퍼스에서 봤을 것이다. 그 스쿠터를 타고 달리는 시원한 바람이 상쾌해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술과 땀 냄새가 미안했지만, 그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렸다. 그에게 거듭 고맙다고 했다. 아주 어려 보이는 친구였다. 내 스마트폰에 전원이 나갔기 때문에 그에게 내 이메일을 알려줬다. 아직 연락이 오지는 않는다. 만나면 정말 근사한 저녁 정도는 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