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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Designeer Jun 03. 2021

나에게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신문연재]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2021년 6월호 - 인생단상 #13

‘이력서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
추도문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사회 현상에 날카로운 시각을 가진 데이비드 브룩스가 한 말입니다. 공부부터 취업, 끝없는 경제활동의 연장선인 우리의 삶은 경쟁에서 살아남고자 이력서를 위해 살도록 훈련받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는 추도문을 읽는 문화는 아닐지라도, ‘죽음’을 생각하면 인생을 살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최근 J. 더글러스 홀러데이의 저서 <여덟 가지 인생 질문>을 읽으며 내 삶에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마지막 질문은 바로 ‘남길 만한 유산이 있는가?’였습니다. 보통 ‘유산’이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요? 아마도 ‘돈’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번역서이기 때문에 원서로는 어떤 단어를 썼을지 모르지만, 이 질문의 의미는 재산을 얼마나 남기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고 난 뒤의 영향력과 평판이라는 뜻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1888년 프랑스의 한 일간지가 스웨덴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이 칸에서 사망했다고 잘못 보도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기사의 제목은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였다고 합니다. 노벨 가문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는데, 그러한 제목은 대량 살상을 가능하게 만든 알프레드 노벨에 대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세간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충격을 받은 알프레드 노벨은 기사 제목이 자신의 마지막 유산이 될까 우려하다 재산의 상당 부분으로 상을 제정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최근에 고 이건희 회장의 유산 중 60%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기사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반 서민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규모의 삼성가의 재산과 상속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갖기도 했지요. 일원 한 푼도 사회에 환원하지 않았더라면 삼성의 평판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 보게 됩니다.


비록 이런 이야기는 일반인의 삶과는 동떨어져있긴 하지만, 죽음이라는 주제 앞에서 사소한 것들에 마음이 사로잡혀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책 내용 중에 옥스퍼드 대학 정원 벤치에 짧은 생을 마감한 러셀 크록포드라는 사람의 명판에 이렇게 적혀있다고 나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저는 이 부분에 밑줄을 박박 그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지만 명판의 이 한 줄은 평범한 한 사람의 많은 부분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묘비에는 어떤 글을 남기면 좋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러셀 크록포드의 명판을 그대로 베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창하거나 구구절절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걸 말해주는 문구 같았기 때문이죠.



추도문이나 묘비명을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늘 하게 되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일 것입니다. 저는 이 질문도 약간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결국 ‘나는 내가 아닌 타인으로부터 어떻게 기억될지를 의식해야만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왠지 모르게 슬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유산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타인이 결정하는 것일까요? 혼자 살아갈 수 없고, 타인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게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문득 아들러의 사상이 떠오릅니다. 내가 유산으로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는 것은 나의 과제이고, 그 결정에 따른 타인의 생각과 평가는 타인의 과제이겠지요. 어느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 내 삶에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는 스스로 정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죽기 전 되고 싶은 모습을 상상하는 질문은 많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저는 스스로에게 다른 질문을 하나 던져보았습니다.

“내가 만약 지금 90세라면,
나는 무엇을 가장 후회하고 있을까?”


저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더 많은 실수와 더 많은 실패를 저지르지 못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마도 지금도 실수와 실패가 두려워 더 많은 시도를 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자신을 나무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질문, 나에게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오늘도 고민해 봅니다.




본 글은 지역신문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2021년 6월호에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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