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한슬 Jan 02. 2022

리더, 피할 수 없으면 잘하자

나는 정말 리더가 되기 싫었네

작년 하반기 겪었던 가장 큰 심경의 변화. 바로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렇구나. 올 것이 왔구나. 내가 리더를 해야되는구나. 이제 좋은 시절은 다 갔구나.



정말 하기 싫었는데


나는 지금까진 줄곧 내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팀워크를 안 한다는 건 아니고. 그것까지 포함해서, 내가 책임져야 하는, 내가 해내거나 해내지 못한 일. 그것만 바라보고 싶었다. 


남이 한 일에 대한 책임까지 지는 건 너무 싫었다. 팀의 전략을 짜는 데 기여하는 건 좋지만 결정을 내리는 건 싫었다. 내 거 제대로 해 내기도 바쁜 세상. 남까지 끌고 가는 리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리더직만큼은 욕심도 야망도 없었다. 즐길 수 없으면 피하자는 신조를 꿋꿋하게 밀고 가고 있었다.



행복한 리더를 본 적 있나요


지금까지 본 리더들이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 것도 중요한 이유다. 그들은 모두 업무 과중에 시달리고 있었다.


리더가 해야 하는 '관리 업무'라는 게 있다. 그걸 해야 하니까 리더인 거겠지. 그런데 내가 일했던 곳에 관리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리더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팀 자체를 챙기고 나서 자기 일 하려고 보면 초과 근무. 야근. 주말도 없이 일하고. 번아웃 되고. 병 걸리고. 언제 쉬는 지 모르겠고. 나는 그렇게는 일할 수 없다. 일은 커녕 살 수도 없다. 


한편 막내이거나 팀원이었던 나는 리더들이 너무 바빠 보여서 말을 걸기도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관리 업무'도 결국에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 리더를 하게 되었나


무주공산에 나 혼자 들어와서 삽 하나 들고 없던 걸 만들어 낼 때는 리더가 필요없었다. 내가 혼자 팀이었다. 그런데 이제 훌륭한 동료들이 들어왔고 든든한 팀이 생겨버렸다. 누군가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


지금 일하는 조직은 나에게 하기 싫은 걸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그런다고 잘 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리더를 거부한다면 새로 영입해 줄 의사도 있었다. 


일단 리더가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나열해봤다.


- 팀의 전체적인 방향, 목표, 전략 세우기

- 각 프로젝트/결과물/제품의 목표 결정

- 팀원들이 목표를 지킬 수 있게 피드백하기

- 팀원들이 강점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챙기기

- 팀 일정 관리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결론적으로 지금 시점에서 우리 팀에서 이걸 제일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나였다. 새로 들어 온 사람은 강점을 발굴하고 케어 받아야 하는 시점이고, 전체적인 방향과 목표를 세우기에도 쉽지 않다. 최소한 6개월은 내가 맡는 게 맞다는 데 나조차도 동의해버렸다.



언젠가 한 번 해야 한다면 지금이다


다른 조직이었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하기 싫다고 했을 것 같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하라고. 


일하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보다 나를 우선해서 챙기는 것이다. 이걸 잊어버리면 무조건 번아웃이 온다. 지금까지 일했던 조직은 내 번아웃을 적극 막아주진 않았다. 그것도 내가 알아서 관리할 일이라고, 나도 조직도 은연중에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조직은 나의 번아웃을 큰 위험 요소로 보고 있다. 내가 혼자 힘들어 하도록 내팽개쳐 두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리더로서 역할을 해내는 데에 내 역량이나 강점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면 같이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리더로서의 경험을 한 번은 해 봐야 한다면 지금이다. 이 조직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별로 성장하기 싫고, 맨날 잘 하던 것만 잘 하면서 일하고 싶고, 하던 거 우려먹으면서 살고 싶은데... 인생이 그렇게만 돌아가진 않는 것 같다. 아무튼 나 같은 성장싫음맨(...)이 이런 마음을 먹는 일은 흔치 않다.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해야 한다.



어떤 리더가 될 수 있을까


그래서 본격적으로 고민이 시작됐다. 나는 어떤 리더가 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기가 너무 싫었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건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겠지? 

연말에 동료들로부터 받은 강점 피드백에 적혀 있는 말을 돌아 보자. 공통적으로 나온 피드백을 모아 보고, KPT 방식으로 분석해 보았다.


- 핵심 목표를 잘 설정할 수 있고 전체 조직과 목표가 연결되는 맥락을 이해하고 있음

- 멤버들에게 솔직하고, 상황 개선에 도움이 되는 피드백을 적시에 함


"팀이 흔들린다는 느낌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팀 운영에 대한 책임감을 배웠다."

"동료들을 이끌고 전반을 관리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

"수용해야 하는 피드백은 적극 수용하고 잘라내도 되는 피드백은 칼같이 잘라낸다."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고 피드백이 분명하고 정확하다."

"더 나은 리더라면 때론 더 많이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분은 단점일 수 있다."

"함께 하는 동료와 언제든 역할을 분담할 수 있기를 바란다."


뭐지? 왜 칭찬이 많지? 나 사실 리더 재질?


가장 공통적으로 자주 언급되는 강점은 솔직한 피드백이었다. 

Keep : 그래 이건 자신 있다. 잘 할 수 있다.

Problem: 하지만 피드백은 나만 잘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분담 가능한 역할이다. 

올해 일 해보니 동료 업무 피드백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게 되면 굉장히 괴로워졌다. 

Try: 피드백에 들일 수 있는 시간을 잘 계산해 보고, 그보다 길어지면 비상사태로 규정하고, 그 원인을 파악해서 해결해야 할 것 같다.


방향성을 제시하는 일도 잘 할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Keep: 지금 조직에서 리더가 해야 하는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 같다.

Problem: 지금까지 리더의 자각이 없었을 때, 눈 앞에 닥친 내 거 신경 쓰느라 전혀 관심을 안 가진 일이기도 하다.

Try: 목표 중심적인 리더가 되어보자. 큰 단위의 추상적인 목표부터, 그걸 달성하기 위해 쪼개진 작고 구체적인 목표까지. 목표를 챙기자. 



어떤 리더가 되고 싶은가


리더 자체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막연하게만 생각해 온 '이상적인' 리더상... 이제 정말 피할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


안타깝게도 내 주변엔 딱히 리더로서의 롤모델이 없다. 저 사람처럼 하자! 라고 내 마음속에 딱 들어왔던 실존인물이 없다. 그렇다고 좋은 리더가 뭔지, 어떤 모습인지, 아무 생각도 없으면 너무 막막할 것 같다. 내가 잘 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판단할 근거가 필요하다.


구체적인 문장으로 내 머릿속을 탐구해보자. 하고 싶다/하기 싫다 문장 10개씩 만들기.


1. 이런 리더 하고 싶다

- 솔직한 리더 하고 싶다

- 구체적인 것을 하자고 하는 리더 하고 싶다. 구체화 할 줄 아는 리더

- 도움 많이 받는 리더 하고 싶다

- 스트레스 많이 안 받는 리더 하고 싶다

- 중요한 순간에 냉정하게 판단해서 짚어 주는 리더 하고 싶다... 예를 들면 스우파 파이널 무대에서 뤠이젼이 허리 삐끗해서 동작 어려워할 때 아이키가 "그래도 이거 네가 하기로 한 거니까 무조건 해야 해"라고 했던 거나(결국 다른 동작으로 바꿨지만 제대로 해냄) 스걸파 탈락배틀에서 효진초이가 "저한테 어필하지 마세요" 했던 느낌으로... 역시 최고의 리더십 교재 스트릿우먼퐈이러

- 막히는 거 있을 때 바로 공유하는 리더 하고 싶다

- 권한을 분명하게 알고 제대로 사용하는 리더 하고 싶다. 작년에도 권한 있었는데 잘 사용을 못했음

- 아이디어가 많은 리더 하고 싶다

- 질문을 잘 던지는 리더 하고 싶다. 팀원들이 아이디어를 막 쏟아낼 수 있게 자극하는 리더

- 결정 이유와 과정을 잘 공유하는 리더 하고 싶다


2. 이런 리더 하기 싫다

- 싸가지 없는 리더 하기 싫다 솔직한 거랑 다름 애초에 싸가지 없게 살면 안 되지

- 혼자 결정하겠다고 다 끌어안고 있다가 결정 시기를 놓치는 리더 하기 싫다

- 팀원들 기분 상할까봐 제대로 권한도 사용 못 하고 할 말도 못 하는 리더 하기 싫다

- 눈치 보는 리더 하기 싫다

- 외로운 리더 하기 싫다

- 말로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리더 하기 싫다

- 지금 이 팀이 뭐 하고 있는지 모르거나 까먹는 리더 하기 싫다 (제일 위험함... 자주 까먹음...)

- 너무 바빠 보여서 말 걸기 어렵거나 무서운 리더 하기 싫다 작년에 이랬다고 한다 주의해야 함

- 답정너 리더 하기 싫다 어떻게 하면 굿 리스너가 될 수 있을까 엄청난 과제다

- 결정을 미루는 리더 하기 싫다 언제까지인지 딱 정해놓으면 그 기한은 지키고 싶다


액션 아이템


지금까지 내 머릿속의 이상적인 리더와 구린 리더, 동료들이 바라보는 리더로서의 내 역량을 바탕으로 액션 아이템을 뽑아 보았다.


- 목표를 잘 챙기자. 구체적으로 챙기자.

- 잘 공유하자. 결정 이유, 과정, 어려움, 아이디어.

- 잘 들어 주자. 굿 리스너가 되자.

- 솔직하자.

- 눈치 보지 말자. 할 말 하자. 권한을 적극 사용하자.

- 피드백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는 걸 경계하자.


회고


리더십에 대한 인풋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마치 나와 내가 리더십에 대해서 회의하듯이 머릿속을 정리해 보았다. 일단 이것만으로도 내년에 해야 할 일이 참 많구나! 어쨌든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명확하지 않으면 첫 발을 떼기가 어렵고 영원히 막연하게 잘 하고 싶다는 초조한 감각 속에 고통만 받게 되는 것 같아서...


구체적인 액션 아이템을 뽑은 게 만족스럽다. 이걸 쭉 적어서 모니터에 붙여 놓고 일해야지. 그런다고 잘 지킬 수 있을까? 없는 것보단 낫겠지...


하기 싫다 하기 싫다 하면서도 일단 해야 하면 하는 편... 리더 역할도 그런 식으로 해 보자. 최대한 구체적인 액션 아이템을 정하고 나면 하기 싫다는 마음보다 '이렇게 하면 되겠군'이라는 마음에 앞서서 더 쉬워지는 것 같다. 화이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