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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한슬 May 20. 2021

2002 05 20

늦게 잡고 되게 친다

'늦게 잡고 되게 친다'는 속담이 내게 꼭 맞는 말이 됐다. 이제사 밤낮 없이 글을 정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버릇 제발 좀 고쳐야지. 태국 기행문과 할머니 이야기를 수삼일 만에 써 가지고 을지로 S기획에 가다. 거기도 마찬가지로 이제 시작하고 있다. 사진도 조금 골라 가져갔다. 이사장이 꽤 노력하고 있다. L 교육대 교수의 글도 도착을 했다. Y군은 연락이 없으니 포기해야지. 이사장이랑 함께 오다 영등포구청역에서 갈리다.


오늘도 오전에 H한의원에 들러 치료를 받다. 뒷덜미 통증은 이제 완전히 좋아진 것 같다.


2002년 5월 20일

 


할아버지는 수필가였다. 한국수필협회에서 내는 월간지에 수필이 실리기도 하고, 칠순 기념으로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 때만 해도 인쇄소에 직접 원고를 가져다 줬던 모양이다. 지인들과 함께 문집이라도 내기로 했던 걸까?


나는 할아버지의 공식 비서였다. 할아버지의 수필 원고를 타자로 쳐서 한국수필협회에 메일로 보내기도 하고, 한시 1500수 가량을 하나하나 디지털로 옮기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주로 여행기, 텃밭과 가족에 대한 글, 자연 풍경을 즐거워하는 시를 쓰셨다. 평화롭고 잔잔한 글이었다.


나도 글을 쓴다. 그렇지만 평화롭고 잔잔한 글은 아니다. 기자로 3년, 에디터로 2년. 출판한 책은 일상 속 차별에 관한 에세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글이고, 뾰족할수록 좋은 글이다. 할아버지와 나는 성향과 개성이 완전히 다르다.


그렇지만 마감을 미루다가 자책하는 모습은 비슷하다. 나는 할아버지가 아주 일찍 일어나고 부지런히 서예 연습을 하고 거의 매일 같이 일기를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늦게 잡고 되게 친다'는 속담은 '늑장을 부리고 머뭇거리고만 있으면 나중에는 급히 서둘러야 하기 때문에 도리어 더 큰 고생을 겪게 된다는 말'이라고 한다. 내 인생을 한 줄로 설명한 것 같다. 내 생각보다 할아버지와 내 성향은 닮았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할아버지가 쓴 책의 모든 글자를 다 읽어봤다. 내가 옮겨 썼으니까. 할아버지는 내가 쓴 책을 읽어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내 책에 대한 할아버지의 감상이 궁금하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그게 궁금하지 않았을까? 할아버지의 너털웃음이나 따뜻하고 주름진 손이 그리운 기분과는 다른 느낌이다. 벽에 부딪힌 건 아니지만,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만난 것 같다.


나는 내 책에 대한 할아버지의 생각을 영원히 알 수 없다. 55살 넘는 나이 차이를 뛰어 넘어 가장 말이 잘 통했던 사람, 그름과 다름을 정확히 구별할 수 있기에 신뢰할 수 있는 대화 상대, 내 생각과 지성과 논리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인데. 


허공을 들여다 보는 기분으로 골똘히 상상해본다. 내 책을 읽고 할아버지는 뭐라고 말했을까?


2021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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