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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윤 Jun 06. 2022

Lisbon, Love, and... 2

날씨와 사람으로 기억하는 도시


대체로 나는 글로 쓰는 것보다 생각이 훨씬 많은 편이다. 그래서 생각을 즉시 지면으로 옮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곤 했다. 젊었을 때는 사유와 글쓰기를 동시에 하려 했지만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패티 스미스 <M 트레인> 중


  좋은 날씨가 친절한 도시를 만든다. 리스본의 5월을 논함에 있어서 날씨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건 추억에 대한 배신일 것이다. 아름다운 햇살과 푸른 하늘은 개인의 행복을 넘어 도시 자체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나는 리스본의 날씨에 거의 빚을 진 셈이나 다름없다. 창문을 열면 눈앞에 펼쳐지는 경쾌함과 넘치는 생명감에 나는 도저히 밖으로 나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진다. 그런 '내'가 모여 모두가 밖으로 나온다. 축복과도 같은 햇빛 아래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어쩌면 눈치 채지도 못할 정도로만 얕게 들뜬다. 가벼운 옷차림과 선글라스, 맨발의 차림. 옷차림새가 한 겹씩 가벼워질 때마다, 꼭 그만큼의 마음속 벽도 함께 허물어진다. 그저 기가 막힌 날씨 아래에서 내리쬐는 햇살의 특권을 받아들이기로만 한다면... 아, 아름다운 사람들을 우연을 핑계 삼아 만나기란 어찌나 쉬운 일이 되는지.


  그날도 나는 이상한 시간에 눈이 떠졌다. 아직도 시차 적응을 하는 중인가 보다. 며칠째 계속되는 기괴한 수면 패턴은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에 잠에서 깨어 절대로 다시 잠들 수 없었다) 나를 긴장시켰다. 가장 활기차야 하는 낮 시간에 헤롱 거리진 않을지, 초저녁부터 잠에 항복하여 호텔방으로 기어들어가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은 생에 첫 서핑을 하러 가는 날이었기 때문에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어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발 푹 자고, 멀쩡한 시간에 일어나길 바랐던 간밤의 작은 기도는 또다시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잠에서 깨어 더듬거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켜 한쪽 눈만 겨우 뜬 채 화면 속 시간을 확인한 나는 좌절하고 말았다. 또 구나. 다시 잠들 것을 단념하며, 핸드폰 잠금화면을 해제한다. 그리고는 내가 자고 있는 동안 친구들끼리 수다를 떤 흔적이 빨간 말풍선 속 숫자로 남겨있는 단체 카톡방에 입장한다. 친구들은 이곳에서 나에게 어떤 마법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운명처럼 마주친 남자와 첫눈에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거짓말처럼 하루 만에 데이트를 하고 키스를 나누지는 않았는지 묻는다. 그 순진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여 미안하지만, 아직까지 나에겐 선물 포장을 벗기듯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 창문의 커튼을 치고, 포장 속 감추어진 선물을 마주치는 기분으로 눈부신 햇살을 만끽하는 일 외에 그 보다 더 특별한 일은 없었다. 먼 곳으로 떠나온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그 어떤 획기적이거나 혁명적인 일이 단숨에 펼쳐지지는 않는다. 친구들도 그저 내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유머 있게 표현한 것이겠지만.


  <오늘은 서핑을 하러 갈 거야.> 그렇기 때문에 친구들은 오늘 나의 계획이 데이트가 아닌 서핑이라는 말에도 실망하지 않고 부러움을 표한다. 지금쯤이면 서울에서는 이제 막 출근하여 오전 근무를 하고 있을 시간일 텐데, 그런 애들에게 너무 자랑을 떠벌렸나 싶은 죄책감이 들어서 나는 서둘러 사실은 심심하고, 별 일은 일어나지 않고, 묵고 있는 호텔도 겨우 모텔을 벗어난 수준 정도라는 말을 덧붙인다. 어째서일까? 나는 누군가가 나를 부러워할 때 병적일만큼 혼자서 난감해하는 경향이 있다. <부러움>은 긍정 혹은 부정으로 이분법 되기보다는, 그 사이를 끊임없이 진동하는 감정이다. 그리고 그 진동이 부정의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건 개인의 역량과 깊이에 달려있다. 나는 부러움을 잘 느끼는 편은 아니지만 한 번 부러워하면 지독하게 부러워한다. 그래서 더더욱, 아무도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나서서 친구들이 균형을 잘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한 면만 보느라 이면을 보지 못할까 봐, 모든 것엔 양면이 있다고 친구들에게 외치고 싶어 진다. 이걸 오지랖이라고 부른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아주 드물게 내가 누군가를 부러워하게 만들 일이 생긴다면 나는 웬만해선 떠벌리고 싶지 않고 표현을 하게 되어도 최대한으로 축소해서 말하고 싶다. 나는 그런 성향인가 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나 혼자 유난을 떠는 거라고 해도,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나 보다. 


  친구들과의 수다, 부러움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들, 동시에 의미 없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스크롤하는 아이러니한 행위까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동이 트기 직전의 어스름함은 과거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이 낡은 호텔은 뻔하게도 방음의 개념이 없다. 옆 방의 대화 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오는 순간부터 타의에 의해 나의 하루도 시작된다. 옆방에는 중년의 부부가 묵고 있었다. 다만 벽에서 한 번 걸러진 그 소리가 어느 나라 언어인지까지는 짐작하기 어렵게 하여 나의 상상에 제동이 걸린다. 아랍어인가 싶다가도, 아닌가 이게 포르투갈어인가? 싶기도 하고. 그들의 말투에서 추정되는 대화의 내용에 대한 상상은 결국 무의식의 영역으로 넘긴다. 

  커튼을 열어 예외 없는 오늘의 선물을 확인하고, 바닷가에 가기엔 더할 나위 없는 날씨네 안심하며 샤워를 한다.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대한 조금의 힌트도 없이.


   서핑 포인트로 향하기 위한 픽업장소에서 엘리를 처음 만났다. 가벼운 플라워 프린트 스커트에 데님 재킷을 걸치고 아이스 라테를 마시며 다가오던 그녀에게 나는 즉각적인 호감을 느꼈다. 이것은 우연이었을까? 그날 픽업 장소에서 만나기로 인원은 총 7명이었는데, 엘리와 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7명이 모두 나타났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엘리는 본인을 "나도 그 노마드야, I'm one of those nomads."라고 소개했다. 리스본에서 디지털 노마드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흔한 일인지 함축적으로 표현해주는 그 인사말이 무척이나 상징적으로 다가왔다. 엘리는 프리랜스 UX 디자이너였고, 100% 원격으로, 일하는 시간과 양을 스스로 조절해가며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하는 모던 워커였다. 그녀를 처음 만난 이 날도 주말이 아닌 금요일이었다. 그녀는 원하는 날, 원하는 만큼만 일을 했다. 리스본에 온지는 이미 한 달이 되었고 앞으로 한 달을 더 지낼 예정이었다. 이전에는 라스팔마스와 런던, 그리고 태국에서 지냈다. 다음 목적지는 인도 아니면 모로코였다. 아니면 아예 다른 곳일 수도. 정해진 것은 없었다. 이렇게나 흥미로운 삶을 사는 여성을 앞에 두고 수다쟁이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최소한 나에게는 불가능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질문을 쏟아붓는다. 


  "원래 나는 비엔나에 있는 가구점에서 세일즈를 했었는데 언제까지 이 일을 하고 있을 수만은 없겠더라고. 그래서 영화 공부를 시작했지. 그게 계기가 되어서 중간에 런던으로 넘어가서 영화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어. 코스 중에 연기 수업이 있었는데, 내가 연기자가 되기로 한 건 아니었지만 그때 그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아.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면 클라이언트에게 스스로를 셀링 해야 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을 다루어야만 하는 순간이 오거든. 그때 나는 일종의 연기를 펼치는 거야. 진짜 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내가 보여주어야만 하는 모습으로 어렵지 않게 분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연기 수업을 들었던 이후 낯선 이의 앞에 서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어. 그래서 지금처럼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노마드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것 같아. 누구를 만나더라도, 어쩌면 연기를 하면서까지도, 나는 쉽게 누구 와든 이야기를 해나갈 수 있어. 아, 물론 디자이너 가 된 건 이후에 우연한 계기로 일어난 일이지만." 

  "그럼 정식으로 디자인 공부를 한 게 아니었단 말이야? 그런데도 클라이언트에게 의뢰를 받아서 디자이너로 일을 한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해? 더 얘기해줘!"


  서핑 포인트로 향하는 밴의 열린 창문 사이로 기분 좋게 바람이 들어와 나와 엘리의 긴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그녀는 볼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내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5월 리스본의 강렬한 햇살에 우리는 둘 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선글라스 너머에 있는 그녀의 눈을 나의 선글라스 너머로 찾아낸다.  


  "그게 좀 특이한 루트이긴 한데..." 그녀가 미소 짓는다.  "맞아. 나는 학위 없이 독학으로 디자인을 익힌 케이스야. 필름 스쿨 코스를 다 끝내고 그 이후에는 카피라이팅 코스를 들었어. 그때는 그게 또 재미있어 보였나 봐. 코스 막바지에 졸업전시를 했지. 그리고 모든 일은 거기에서 시작된 거야."

  "너에겐 늘 창조에 대한 열망이 있었나 봐. 영화부터 카피라이팅 그리고 디자인까지 다 창조의 영역이잖아."

  "그런가? 그렇게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너 말이 맞는 것 같아."

  "아무튼 그래서? 졸업 전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아, 응. 보통 졸업 전시에 회사 인사담당자들도 참석하곤 하잖아? 내가 그중 한 명의 눈에 띈 거지. 그래서 인턴 제안을 받았는데 웃기게도 그게 카피라이터 포지션이 아니라 그래픽 디자인 포지션이었던 거야! 믿어지니? 그 담당자 눈에는 전시 중인 카피가 아니라, 그 카피를 담고 있는 레이아웃 디자인이 더 인상 깊었나 봐. 정말 웃긴 일이지. 결국 나는 그래픽 디자인 인턴으로 그 회사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기초부터 천천히 그래픽 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했어. 그게 내 디자이너 커리어의 시작이야. 나중에는 프리랜서로 일하고 싶은 마음에 방향을 틀어 UX를 공부하긴 했지만 말이야."

  "와. 정말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지만 카피라이팅 졸업 전시에서 디자이너 잡 오퍼를 받다니. 역시 런던에서는 별의별 일이 다 가능하네."

  "그렇지? 난 그래서 여전히 런던을 너무 사랑해. 그리고 그거 아니? 그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아무래도 카피라이팅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간간히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때 내가 쓴 카피가 런던 맥도날드 햄버거 포장지에 적히게 됐었어!"

  "네가 일했다는 그 회사가 맥도날드였어?!"

  "맞아! 메인 광고 문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햄버거 먹을 때마다 모두가 내 카피가 본다니, 진짜 쿨하지 않아?"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이어나가는 동안 어느새 바닷가에 도착한 우리는 서핑 클래스가 끝나고 나서도 오늘 남은 하루를 바닷가에서 함께 보내기로 결정한다. 나는 엘리가 마음에 들었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우리는 일회성 만남으로 그치지 않고 진짜 친구가 될 것이라는 걸. 계획을 따르기보다는 흘러가는 대로 삶을 살고 즐길 줄 아는 지혜와 인생이 주는 우연을 기회로 바꿀 줄 아는 용기,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을 지금보다 어렸을 적의 경험에서 찾는 혜안까지. 만약에 이것이 엘리와의 첫 만남이 아니라 어떤 남자와의 첫 데이트였다면 나는 이 남자에게 푹 빠졌을 것 같다. 재지 않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만 싶어서. 자기만의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사람은 정말이지 얼마나 매력적인가. 


 자연스러웠던 우리의 만남은 내가 리스본의 아름다운 날씨에게 진 첫 번째 빚이었다. 시차 적응에 실패하고 방음이 엉망인 호텔방에서 옆 방의 대화 소리를 고스란히 견디는 와중에도 커튼은 포장지고 창문은 선물 같았다. 사람을 밖으로 이끄는 마력에 굴복하며 나는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게 되고, 지금 밖에 나와 있는 모두는 나와 마찬가지로 햇살을 온몸으로 흡수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사람들이구나 라는 생각으로 길에서 마주치는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기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햇살을 품은 사람은 친절해진다. 리스본은 그래서 친절한 도시이다. 엘리와의 대화가 쉬웠던 것도 다, 모든 게 다 날씨 탓이었다. 좋은 날씨가 친절한 도시를 만든다.


  각자의 서핑 클래스를 마치고 돌아와 다시 만났을 때 엘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알렉스 그리고 맥스라는 두 사람과 함께였다. 아직 정오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우리에겐 여전히 하루가 통째로 남아있었다. 해가 중천이었다.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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