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잘 버리고 있어?
친구는 주기적으로 나를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 원래 남의 일은 더 궁금하기 마련이지만 유독 내게 관심을 많이 주는 친구다.
일 년 정도 고기를 먹지 않은 적이 있다. 완전한 비건은 아니었지만 육고기를 제외하고 생선은 먹는 페스토 베지테리언 정도였다. (계란, 우유도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페스토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듯하다.) 성철스님의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아 그날로 바로 냉장고를 뒤져 고기와의 이별을 선언했었다. 일년즘 되었을 때 영양 부족과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 선생님의 말에 흔들리고 말았다. "고기를 먹어서 나빠지는 것이나 안 먹어서 나빠지는 것이나 매 한 가지입니다. 차라리 고기를 드시고 영양 결핍과 알레르기를 치유하는 것이 낫지 않겠어요?" 명언이었다. 그때도 친구는 고기를 먹고 있지 않은지 주기적으로 나를 점검했다. 마치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 경고하듯 말이다.
신념이란, 누구에게나 있으며 자신의 눈으로 봤을 때 부당하다거나 불편하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 또한 신념은 언제나 바뀔 수 있으며 그렇다고 해서 가벼운 사람도,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는 없다. 성철스님의 글은 여전히 나에게 충격적으로 남아있고 육고기로 인해 인간 육체의 변화, 즉 여러 가지 병마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는 한치의 의심도 없다. 다만 신념이 나의 생명과 바꿀 만큼 절실하지 않았을 뿐이다.
무조건 다 버리고 살며 무소유의 삶을 살겠다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소유로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최소의 수준은 사람마다 다를 뿐 누가 더 많이 가졌느냐를 가늠하는 양의 차이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여러 차례 이사를 했고 버릴 만큼 버렸고 필요한 만큼은 구매했다. 다만, 예전의 구매는 아무런 고민이 없었다면 지금의 구매는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여러 번의 질문을 거치는 고민을 말한다. 예전의 구매는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지금의 구매는 소유한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으며 다음 구매는 좀 더 신중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나에게 비움이란 이런 것이다. 모두 버리고 덩그러니 이불과 베개 하나만 놓인 방에 몸을 뉘자는 것이 아니다. 좌식 생활이 힘든데 의자나 식탁을 모두 버리고 접이식 밥상 하나로 식탁으로도 쓰고 책상으로도 쓰자는 것이 아니다. 식탁을 소유한 나는 상상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는 친구의 눈빛에 구구절절 설명하기 어려워 그저 웃고 만다.
나에게도 최소한의 빛은 필요하다. 가급적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으려 노력할 뿐, 필요한 것은 소유하며 산다. 그저 소유의 개념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지금도 여전히 집안을 둘러보면 많은 물건과 옷과 신발과 심지어 쓰레기통도 많다면 많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두 개를 하나로, 세 개를 두 개로 줄이는 삶을 살고 있을 뿐, 버리기만 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친구는 다음 만남에서 이렇게 인사를 건네겠지?
요즘은 뭘 버리고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