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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라떼샷추가 Oct 04. 2024

현실보다 낭만을 알려주고 싶은 아빠 마음


하루는 유아차를 끌고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새치기를 당했다. 내 앞에는 5명, 뒤에는 20명 넘게 줄을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줄 서 있던 사람들이 문 앞으로 바짝 달라붙기 시작했다. '어? 이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대?' 문이 열리고 앞사람들 따라서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내 옆에서 할머니들 여럿이 순간이동하듯 나타나 먼저 탑승해 버렸다. (무슨 닌자인 줄) 그사이 엘리베이터는 가득 찼고, 내가 탈 공간은 없었다. 


어이없고 짜증 나는 마음에 새치기한 할머니들을 째려봤다. 할머니들은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내 눈빛을 무시했다. 그리고 비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몸을 움츠리며 빨리 문이 닫히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먼저 탄 사람들도,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그 상황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 "거참~ 아이 좀 먼저 태우지... 쯧쯧쯧..." 그렇지만 변할 건 없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한번 더 기다리기로 했고, 그 할머니들은 새치기한 덕분에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되었다. 


새치기를 당한 불쾌함이 생각보다 오래가더라. 공공도덕과 예의범절 문제는 둘째 치고, 내 시간을 뺏긴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라는 성경에 적힌 가르침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는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더 세게 그의 오른쪽 뺨을 때려라'라는 자연법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날 이후부터는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 새치기하려고 하면 농구에서 배운 스크린 동작으로 새치기를 하려는 사람들을 막아섰고, 새치기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빠르게 유아차를 엘리베이터 문 안으로 들이밀어 넣었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자기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내 시간 역시 소중하니까.




이런 경험이 하나씩 쌓이다 보니 점점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요즘은 친절을 베푸는 일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괜히 호구 잡히는 기분이랄까. 혹여나 누군가 먼저 친절을 베풀어도 그 의도부터 의심하게 된다. 게다가 이제는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나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며 똑같이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지금 모습과는 달리 20년 전에는 우아한 낭만을 꿈꿨었다. 내가 어른이 되면 그 누구라도 배려하며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일 것이라 기대했다. 내가 베푼 친절이 더 큰 친절이 되어 돌아오고, 내게 베푼 친절이 상대방을 통해 또 다른 이에 대한 친절로 확대 재생산되는 그런 사회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때는 이기적인 사람을 만나도 나의 친절함에 감화되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과 현재 내 모습이 겹쳐보이며 왠지 마음 한편이 씁쓸해졌다.


다시 한번 더 낭만을 꿈꾸고 싶다. 현실에 치이다 보니 낭만을 잃어버린 지 오래지만, 내 아들에게만큼은 낭만이 가득한 아빠가 되어 주고 싶다. 5살 아들에게 알려줘야 하는 건 치열한 삶의 현실보다는 가슴 두근거리는 낭만일 테니 말이다. 참.. 좋은 아빠 되기 어렵다. 자식이 지켜봐 주는 덕분에 늘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고민할 수 있다는 점은 감사한 일이지만.


너에게 낭만을 선물로 주고 싶어ㅣ전쟁기념관 ㅣⓒ녹차라떼샷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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