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광머리 앤 Apr 23. 2024

치술령을 넘으며

 

육십 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넘으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 같다. 좀 더 순하고, 이해하고 아는 삶. 지금까지는 가끔 모질어지기도 했고, 나에게 일어난 일의 원인과 결과를 몰라 답답하기도 했다. 우리는 자주 말한다. 이 고비만 넘으면, 한 고개만 넘으면, 다 좋아지니 견디자고 한다. 육십 고개를 넘으면 좀 더 지혜롭고 슬기로워질까?

이십여 년 전 울산에 처음 이사 왔을 때, ‘깔딱고개’라는 명칭을 들었다, 이름만 들어도 그 고개가 얼마나 숨이 넘어갈 만큼 고통스러울지 느껴졌다. 깔딱고개는 문수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설악산에도 있고 전국의 여러 산에 있다고 하니,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고개를 넘는다는 건 숨이 차는 고비가 있나 보다. 

숨이 꼴까닥 넘어가는 깔딱고개가 누구에게나 있다. 그 고개 앞에서 엎어지기도 하지만, 깔딱깔딱 숨이 차게 넘어가기도 한다. 내 인생의 깔딱고개가 몇 개나 있었냐고 묻는다면 최소 손가락 다섯 개는 필요하다. 그 고개를 넘어서 나는 여기에 섰다. 

고비를 넘을 때, 얼마나 더 가면, 얼마나 더 견디면 되느냐고 묻는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에게 묻기도 하고, 나보다 먼저 그 고개를 넘은 사람에게도 물어본다. 자기가 믿는 신에게도 물으며, 무당을 찾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고개를 넘지 못한 사람에게도 같은 질문을 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조금만 더 견디라고 한다. 깔딱깔딱 숨차게 고개를 넘으라고 한다. 그런 대답을 반만 믿으면서도 그 말에 의지해 고개를 넘어간다.

그런데, 고개를 넘지 않은 이가 있다. 고개 이편에도 속하지 않고, 저편으로 넘어가지도 않은 채, 돌이 되었다. 솔개나 수리가 넘어가는 높은 고개에서 떠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그리며. 경계에 서서 고개를 지키는 신모(神母)가 되었다. 

우리는 어디엔가 속한다. 속해있지 않으면 불안하다. 신모는 남편 없이 사는 고개 이쪽의 삶에도 속하지 않았고, 고개를 넘어 남편에게로 더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이보다 앞선 시대의 연오랑과 세오녀는 바위를 타고 서로에게 갔다. 이 아름다운 부부의 시대를 지난 후대에, 남편을 잃은 아내는 남편을 그리워할 뿐 고개를 넘거나 바다를 건너가지 못했다. 경계에 서서 돌이 되었다. 아내는 고개를 오르지 않고, 이편에서 아이들과 삶을 이어나갈 수 없었을까? 아니면 치술령을 넘어 저편에 있는 바다를 건너 남편에게 갈 수 없었을까? 왜 그녀는 고개에 멈춰서서 남편을 그리워만 했을까?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추앙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정신일 것이다.

현대 여성인 나는 자동차로 치술령을 넘는다. 4년 전에 경주로 이사 오고 난 후부터이다. 대부분 고속도로로 출퇴근을 하지만, 시간이 있으면 치술령을 넘을 때도 있다. 치술령을 넘으면서 어느 바위 밑에 새로 변한 신모와 딸들이 숨었을까 상상해 본다. 

치술령은 경주와 울산을 가로 짓는 경계에 있다. 나에게 경주에서의 삶은 이상이고, 울산에서의 삶은 현실이다. 울산에서는 두 아이를 키웠고, 남편과 치열하게 다투며 살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아이들이 떠나고 남은 삶을 경주에서 살고 싶어서 이사했다. 

지금 사는 경주의 오래된 동네는 어릴 적 살았던 우리 동네 같다. 꼬불꼬불한 골목에는 채송화와 나팔꽃이 피어 있다. 기와집과 낮은 담장, 그 너머의 접시꽃을 보면 시간여행을 해서 유년으로 돌아간 것 같다.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에서 내 생일 즈음에 피던 장미와 중학교 교화였던 목련, 역시나 고등학교 교정에 피던 매화를 마당에 심었다. 

집 근처의 분황사와 황룡사지를 산책하며, 솔거가 그렸을 나무를 상상하고, 황룡사 법당에서 설법하였을 원효를 그리워한다. 어느 동화작가처럼 황룡사지에서 밤을 새우며, 이천 년 전 서라벌을 환상으로 볼 배짱은 없지만, 선화공주가 지나가고, 선덕여왕이 행차하고, 처용이 춤추었을 도로가 묻힌 집에서 신라를 배경으로 하는 기가 막힌 동화 한 편을 쓰고 싶다. 이것이 나의 이상이다. 

경주에서의 이상과 울산에서의 현실을 오가며 하루하루를 채워나간다. 치술령을 넘으며 경주와 울산의 경계에 갇혔던 신모를 생각한다. 그녀가 갇혔기에 오늘 내가 치술령을 넘는다. 그녀를 거쳐 내가 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요즘 내 상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