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파리에서 열린 하모니 뮤츄엘 세미 드 파리 (Harmonie Mutuelle Semie de Paris) 대회에 참여했다. 하모니 뮤츄엘 회사에서 개최하는 이 경기는 매년 파리에서 개최되는 하프마라톤 대회로, 마라톤 드 파리 다음으로 규모가 가장 큰 마라톤 대회이다. 전 세계의 마라톤 선수들, 마라톤 애호가들, 초보 러너, 혹은 독특한 파리 투어에 관심 있는 관광객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대회이다. 파리의 중심부에서부터 외곽의 공원까지 왕복코스로 이루어져 있어서, 대회 당일날 파리 거리 곳곳이 통제되기 때문에 사실상 파리 중심부를 조깅하며 관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세미 드 파리 경기에 참여하는 관광패키지 상품도 많다.
큰 행사답게 이벤트가 굉장히 다양했다. 경기 일주일 전에 러닝복과 배번호를 수령하러 갔는데, 대형 컨퍼런스장에서 이런저런 행사와 후원사들의 굿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매년 후원사들이 바뀌는 것 같던데 올해는 현대자동차가 후원사에 있었다. 기대치 않은 곳에서 한국 기업을 만나니 굉장히 반가웠다.
지난 브런치글에서 밝혔듯, 나는 평균페이스 8:00에 3km도 한 번에 못 뛰던 저질 초보 러너였다. 그간 종종 한 달에 한두번 정도 친구들 따라서 조깅을 하곤 했었지만 달리기를 즐기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아닌 그냥 운동이라는 것을 한다는 시늉을 내보기 위해 뛰어다니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연구실 친구들 따라서 하프 마라톤 대회를 등록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름 3개월 간 마라톤 트레이닝을 시작하여 3월 초에 열린 대회에 출전하기까지 이르렀다. 그 3개월 간 신발 그까짓 거 아무거나 신고 뛰면 되지라는 안일한 생각에서 슬리퍼를 신고 아프리카 대지를 달려본 적 없는 연약한 현대인은 운동화라도 좋은 것을 신어야 한다라는 입장으로 바뀌었고, 유튜브 정석근 코치님 영상을 꼬박꼬박 찾아보면서 자세 교정도 해보고, 케이던스를 높이려고 제대로 팔을 휘두르는 법도 트레이닝하게 되었다. 내가 따라한 3개월 트레이닝 일정표를 첨부해 두었다. 내 경험 상, 생초보라도 이 트레이닝 일정표를 꼬박꼬박 잘 지켜서 따라한다면 3개월 내에 하프마라톤 완주가 가능하다.
경기는 아침 8시부터 시작이었는데, 가장 빠른 타임에는 선수들이 뛰는 구간이었다. 12시까지 한시간 간격으로 출발선이 열렸는데 나는 10시 타임 구간이었다. 내 실력 상으로는 가장 늦은 12시 타임에 뛰는 게 맞는데, 같이 출전하는 친구들이 워낙 잘 뛰는 애들인지라 10시 타임에 같이 출발하기로 했다.
아침에 경기장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는 데 세미 드 파리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였다. 예전에는 아, 뭐 경기가 있나보다 하고 말았었는데 지금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경기에 나간다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소속감이 느껴졌다. 출발점 근처 역에 내리니 어마어마하게 많은 인파들이 똑같은 복장에 배번호를 붙이고선 삼삼오오 모여 몸을 풀고 있었다. 소방관들도 같은 팀복을 맞춰 입고 배번호를 붙이고 있었고, 친구들, 가족들, 연인들끼리 참여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이 도시 한복판에 이만한 인파들이 같은 옷을 입고 마라톤 대회에 나가려고 몸을 풀고 있는 걸 보니, 뭔가 여태 모르고 살았던 새로운 던전에 입성한 기분이었다.
첫 경기라 긴장됐다. 전 날 사실 잠도 잘 안 왔다. 트레이닝 기간에 가장 오래 뛰어본 게 15Km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더 긴장됐다. 잘 뛸 수 있을까? 뛰다가 포기하게 되면 어쩌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앞서 참여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대기줄에서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데만도 1시간 정도 걸렸다. 저 멀리 대형 무대에서는 참가자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이벤트가 한창이었는데, 신나는 음악과 함성으로 출발점은 완전 공연장 느낌이었다. 으, 그래도 나는 좀 떨렸다. 뛰다가 힘들면 포기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심 완주에 욕심이 있었던 건지 영 긴장됐다. 오 이제 우리 구간 차례다. 큰 비프음과 함께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처음 10km 까지는 그 간 트레이닝 한 것도 있고, 사람들의 큰 응원을 받으면서 뛰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뛰니 힘든지도 모르고 뛰었다. 매 1km 구간마다 마칭밴드, 락 밴드, 치어리딩팀, 레게 밴드 등 다양한 응원단들이 공연을 하고 있었고, 마라톤 라인을 따라서 지나가던 행인들도 엄청 많은 응원을 해줬다. 가족들, 친구들이 큰 팻말을 만들어서 응원을 하기도 했다. '엄마 화이팅'이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아빠 어깨 위에서 오매불망 엄마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아이도 보였고, 친구의 사진과 이름을 팻말에 붙여놓고 열심히 흔들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Touch for booster'라고 슈퍼마리오 버섯을 그린 골판지를 참가선수들에게 내보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선수들 옷 뒤에 쓰인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며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뛰면서 보이는 이런저런 모습들이 너무 신기하고 재밌어서 10km까지는 나도 모르게 웃으면서 뛰었다. 나중에 찍힌 사진을 보니 약간 광기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10km가 넘어가니 그때부터는 마라톤 코스에 기이한 정적이 돌았다. 간간이 들려오는 호흡소리, 발자국 소리를 빼고 그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저 각자의 세상에서 뛰고 있었다. 조금씩 한계점이 오는 구간이었다. 슬슬 걷기 시작한 사람들도 보였다. 나는 내 실력보다 더 빠른 타임라인에서 뛴 터라 뛰는 동안 내내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추월을 당했는데, 이때부터는 누군가가 나를 추월한다는 생각조차도 떠오르지 않았다.
15km 지점이 되니 발바닥, 발목, 종아리, 무릎, 허벅지, 엉덩이, 허리 안 아픈 곳이 없이 통증이 심했고, 3월 초 꽃샘추위의 바람에 오랫동안 노출된 손은 딱딱하게 굳어서 잘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16km부터는 21km 완주 구간까지 불과 5km 남은 구간인데도 1km, 1km가 너무도 고되고 힘들었다. 초반에는 1km 구간 표시가 아주 빨리 나타났던 것 같은데, 이때부터는 뛰어도 뛰어도 구간 표시가 안 나타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절대 포기하지 말자, 남들 빨리 걷는 속도로 뛰더라도 계속 뛰자 다짐하면서 뛰었다. 오랜 바람에 눈도 아프고, 오르막길 때마다 힘이 빠지고 헉헉 거렸다. 허리도, 발바닥도, 무릎도 이미 내 몸이 아닌 기분이었지만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힘내자 속으로 엄청나게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뛰었다. 살면서 이 정도로 스스로한테 조금만 더 힘내라고 응원한 적이 있었나 싶었다.
18km 구간에서부터는 파리 한복판으로 무수한 인파들이 응원을 나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응원을 해주었다. 귀로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속으로는 제발, 제발, 제발 하고 스스로 되뇌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구간부터는 부상자도 슬슬 보였다.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응급구조대들에게 치료를 받는 사람들도 보였다. 감동적인 모습들도 보였다. 부상당한 애인과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완주선까지 뛰는 커플도 보였고, 호호백발의 할아버지 친구 두 분이서 서로 응원하면서 뛰는 모습도 보였다. 일면식도 없지만, 포기하고 걷고 있는 다른 참여자에게 '거의 다 왔어요 힘내요'라고 용기를 주고 지나가는 참여선수들도 보였다. 키 큰 사람, 키 작은 사람, 뚱뚱한 사람, 마른 사람, 여자, 남자, 어린 사람, 나이 든 사람, 케냐 사람, 독일 사람, 미국 사람, 한국 사람 아주 많은 사람들이 완주선을 향해 빨갛게 물든 얼굴로 뛰고 있었다.
21km 완주선이 가까워지자 그때부터는 파리를 울리는 큰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늘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고 응원하는 입장만 되어봤지, 그런 응원을 받아보는 선수 입장은 처음이라서 참 새로웠다. 그 완주선 끝에서 들려오는 함성소리가 엄청나게 힘이 되었다. 그 덕에 완주선을 500m 앞두고는 내 생전 처음 달려본 속도로 마지막 스퍼트를 올릴 수 있었다.
2시간 30분, 7:09 페이스로 하프 마라톤 완주에 성공했다. 평소 단거리 트레이닝을 해도 이 정도 페이스로는 뛴 적이 거의 없는데, 평소보다도 훨씬 더 좋은 기록이 나왔다. 너무 신기했다. 근데 정말로 정말로 열심히 뛰었다. 뛰다가 다리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완주만 하자는 마음으로 뛰었다. 이제와서보니 뭘 그렇게까지 비장했을까 싶은데, 초보자의 마음인지라 그랬었노라.
꿈 같은 경험이었다. 초보자 수준에서 하프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즐거웠고, 이만큼 많은 응원을 받아본 것도 즐거웠다. 내가 이런 일도 할 수 있구나라는 걸 알아서 좋기도 하다. 이로서 올해 내가 할 일은 다했다고 본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