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비친눈 May 16. 2019

그저 바라본 아름다운 순간

두 번째 BGM 이야기: Fisherman's horizon

BGM Memory#002


선선한 바람에 눈이 떠졌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침대 옆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파란빛으로 가득했고 방 밖의 호스텔 테라스는 본디 하옜지만 강렬한 적도 부근의 태양빛에 약간 노랗게 바래져 있었다. 아침과 점심 두 번이나 서핑 보드 위를 구르며 웰리가마의 파도를 타느라 몸이 아직도 무거웠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머리 위로 내려왔던 졸음은 두 시간 사이에 사라졌지만 종아리에는 서핑보드 위에서 느꼈던 파도의 짜릿함이 뻐근함으로 남아 있었다. 태양이 뿜어내는 자외선에 무방비로 노출된 피부는 좀 걱정되긴 했지만. 밖에선 열대의 화창한 삼중주가 들려왔다. 야자수 이파리가 현이 되어 바람 따라 흔들리며 내는 베이스 소리에 저 멀리 들려오는 파도가 바다 위에 부서지는 소리가 드럼처럼 리드미컬하게 들렸고 그 위에 새들의 지저기는 고음역대 소리는 피아노마냥 멜로디를 더해줬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뻐근한 몸을 침대에서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햇볕은 아까보단 기울긴 했어도 아직도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강렬한 시선의 그녀를 더 이상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다시 몸은 침대 위로 넘어졌다. 눈은 감겼지만 깨어있었고 느끼고 있었다. 삼 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즈음 왠 소리가 들렸다.


"야옹"


움찔하고 눈을 떠보니 문으로 고양이 한 마리가 유유히 들어왔다. 녀석과 내 눈이 마주치자 그냥 놀러왔다는 듯 시크하게 눈 한번 깜빡였다. 그러고선 침대 위로 올라와 내 몸을 한 번 밟고 지나가더니 옆에 누웠다. 녀석은 황당해하는 나를 옆에 두고선 방을 쓱 한 번 둘러보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해변의 모래 색을 닮은 자신의 털을 그루밍하기 시작했다. 몇 번 쓰다듬어주고는 나도 더 이상 꼼짝하기 싫어 녀석이 뭘 하든 그냥 누워있었다. 우리는 이렇다 할 대화 없이 느긋하게 시간이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다.


냥님: 쉬어. / 나: 네? / 냥님: 더 쉬라고.


얼마나 지났을까. 멀어지는 '야옹' 소리에 다시 눈을 떠보니 녀석은 어느새 사라졌고 건물 벽에 비치는 햇빛은 전보다 진하게 노래졌다.


밖을 나섰다. 해는 고국에서 봤을 때에 비해 훨씬 큰 반원을 그리며 북서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남쪽으로 걸어갔다. 어릴 적 부산 근교 시골의 외가에서 보았던 낯익은 풍경을 맞이했다. 울퉁불퉁 패여진 흙바닥 길, 낮은 담벼락, 그 너머 기와지붕 아래 창문 열린 집. 잠깐의 잔상처럼 지나쳐온 길 끝에는 이차선 도로와 한 줄로 늘어선 야자수들, 그리고 노랑빛 담은 갈색의 모래사장과 푸른 인도양이 보였다. 발걸음을 좀 더 재촉했다.


모래사장으로 들어서자 슬리퍼가 거추장스러워졌다. 파도에 젖은 모래에는 맨발이 더 가벼웠다. 누가 가져갈까봐 불안했지만 누가 가져가면 어때 하며 넓게 가지를 뻗은 나무 아래 바위에 고스란히 모셔두고 탈의한 티셔츠도 나무 사이로 묶인 줄 위로 던져놓은 채 털레털레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드는 백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50m를 걸어 들어가서야 바닷물이 목까지 차오르는 웰리가마 해변은 서핑뿐 만아니라 해수욕을 즐기기에도 제격이었다. 아직 남은 열기를 마저 내뿜는 햇빛을 피해 물아래로 몸을 피했다. 혼자였지만 웃음이 가득했다. 유유자적하게 낮의 마지막을 근본 없고 방향 없는 해수욕으로 끝내고 바다에서 해변을 바라보았다. 서쪽으로 치우친 햇빛은 어느새 육지 뒤로 숨었고 부끄럼이라도 타는지 그 위의 하늘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갔다. 그 모습에 황홀해 절로 입에선 '미쳤다'란 단어가 툭 나왔다. 순간을 남기려 버릇처럼 휴대폰을 찾던 나는 지금 내가 가진 문명의 이기라고는 눈에 낀 렌즈와 입고 있던 수영복뿐이란 걸 깨달았다. 때마침 올해 초에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월터: 언제 찍을 거예요?
숀:어떤 때는 안 찍어. 아름다운 순간을 보면 난 개인적으로는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지.
월터: 순간 속에 머문다고요?
숀: 그래, 바로 저기. 그리고 여기.
                                                                              -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중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지

그 한마디가 머리에 맴돌면서부터 바라만 보았다. 말 그대로 순간 속에 그저 머물고 싶어 졌다. 서서히 차가워지는 저녁 공기에 몸은 다시 아직도 한낮의 열기를 품고 있는 바닷물 속으로 점점 들어갔다. 해를 품은 육지는 일분일초가 흐를수록 더욱 진한 아우라를 하늘 위로 퍼뜨려갔다. 내 뒤로 보이는 몇십 미터 채 떨어지지 않은 섬에는 까마귀들이 그득했고 간간이 자리싸움이라도 하는 듯 소란이 일었지만 그조차도 음악 같았다. 스리랑카 남부 해안으로 밀려드는 인도양은 적당한 간격으로 예쁜 파도를 너울져 일으켜 끊임없이 해변의 품에 안겼다. 그러면 저 멀리 떨어진 해변가에서 서퍼들은 보드에 앉아 파도와 밀당하다 눈이 맞은 이의 등에 업힌 채로 함께 해변으로 날아가듯 들어갔다. 해변에 부딪치는 파도소리, 이따금 들리는 서퍼들의 환호, 야자수 위로 날아든 까마귀의 울음소리, 그리고 저 멀리 한낮 조업을 마치고 들어와 그 자리에서 왁자지껄 어시장을 만드는 현지인들. 그 모두가 평온한 하루의 마지막으로 달려가는 웰리가마의 앙상블이었다.


드디어 서쪽 하늘이 선명하고 붉은 핏빛으로 마지막을 강렬히 발하자 해변 여기저기 나무로부터 까마귀들이 한꺼번에 소리 내어 날아올랐다. 오감으로 느끼는 그 순간 모두가 내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의 풍미였다.


스리랑카 웰리가마 해변 풍경1


스리랑카 웰리가마 해변 풍경2



Introduction of Song


Final Fantasy VIII의 OST 'Fisherman's horizon' (Original Version)


이 글을 쓰기 일주일 전에 나는 스리랑카 웰리가마에 있었다. 테러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정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해변 마을은 평안했다. 서핑하기 좋은 곳으로 소문난 곳답게 질 좋은 파도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비수기임에도 서핑을 즐기는 여행객들이 많았다. 그리고 서핑과 이질적이었지만 그리 멀지 않게 떨어진 곳에는 오늘 갓 잡아 올린 생선들로 가득 찬 어선이 하루를 끝내고 해변에 들어와 그 자리에서 장터가 벌어졌다. 신선한 생선을 구하려는 현지인들의 투닥거리는 소리는 한국이나 스리랑카나 똑같았고 그 주변에 퍼지는 어시장 내음은 비리지만 정겨웠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크리켓을 즐기는 스리랑카 십대들이 활기 넘치게 해변을 뛰어다녔고 그 해변 앞을 때때로 아이를 데려온 스리랑카 부부의 정다운 모습이 지나갔다.


이 모든 순간을 보면서 아름다운 일상의 평화를 느꼈고 그래서 웬일인지 이 음악이 그냥 떠올랐다. 'Fisherman's Horizon'. Final Fantasy VIII의 OST 중 하나였고 게임 중에 특정 지역(음악과 이름이 같은 지역)에 들어서면 유유자적하게 고요히 나오던 음악이었다. 음악이 흐르는 배경의 마을도 이미지가 어촌 마을이었고 평화로운 편이었다. Final Fantasy VIII는 Final Fantasy 시리즈 중 내가 처음으로 해보았던 타이틀이었다. 그렇게 썩 재미가 있던 건 아니었지만 당시로는 꽤나 훌륭한 그래픽이었고 전작의 유명세에 왠지 모를 의무감을 가지고 플레이했었다. 이제는 스토리가 잘 기억도 안 나고 게임도 많이 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지만 이 음악만큼은 또렷이 기억난다. 그래서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의 이미지를 보면 자연스레 이 음악이 떠오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위에 링크한 곡이 Fisherman's Horizon 원곡이라면 아래 링크는 오케스트라로 편곡된 버전이다. 오케스트라 버전이라 원곡보다 훨씬 풍성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버전을 더 선호한다. 


Final Fantasy VIII의 OST 'Fisherman's horizon' (Orchestral version)


작가의 이전글 내 여행 북마크가 되준 음악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