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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비친눈 Jun 15. 2019

이(異)

BGM: Duke Jordan - Glad I Met Pat

'이(異)'

'다름'의 한자어. 보통 비교 대상의 형질이 다를 때 쓰인다.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 상태에도 쓰일 수 있다. 異의 원형은 얼굴에 이상한 가면을 쓴 사람을 본뜬 형태다. 그래서 기이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글자 하나에는 감정이 없다. '차이'를 드러낼 뿐 '차별'은 없다. 그래서 함께 쓰는 글자가 무어냐에 따라 풍기는 심상은 확연히 달라진다. 어떤 때는 뛰어남을, 어떤 때는 진귀함을, 혹은 괴이함을 표현한다. 그야말로 다채로운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다용도 글자이다.

그래서 이 글자를 쓸 때는 조심해야 한다. 때로 일부는 '틀리다'라는 의미로 오용하기도 한다. 일부러 존중으로 포장된 경멸의 속내를 감추려 남용하기도 한다. 잊지 말자. 이 글자 혹은 '다르다'는 '차이'의 인지만을 담고 있는 글자란 것을.


#기이()

그 날은 외삼촌네 이사일이었다. 언덕 위 누나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던 외삼촌의 집은 달콤한 신혼부부의 보금자리기도 했다. 아비는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띄운 채 친동생 마냥 데리고 있던 외삼촌의 어깨를 연신 두들겨 댔다. 경상도 특산으로 치부하기엔 무척이나 무뚝뚝했던 외삼촌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그날은 설레고 기쁜 날이었다. 이사에 정신없는 와중에도 짓궂은 농담과 애정 어린 덕담이 흘렀다. 


짐이 제법 새 집에 자리 잡았을 무렵이었다. 


- 아이고, 망치가 없구나. 내 퍼뜩 근처 철물점 가서 공구 몇 가지 좀 사오끄마. 


어미는 손이 심심했던 아이를 아비의 손에 딸려 보냈다. 


- 주야, 아빠 따라갔다 온나.


마음 급한 아비는 벌써 문 밖을 벗어나고 있었다. 행여 아비를 놓칠까 아이는 계단 아래로 내달려 대문을 나섰다. 그 순간 웬일인지 바깥은 하연 연기로 서서히 뒤덮이기 시작했다. 방구차라도 지나갔나? 소리 안 났는데? 냄새도 안나. 안개일지 연기일지 모를 정체불명의 기이한 대기에 아이는 갸웃거렸다. 다시 들어갈까 생각할 찰나 아비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아빠의 저 손을 잡으면 괜찮을 거야. 아이는 막연히 떠오른 생각에 아비를 쫓아갔다.


- 아빠! 아빠아~!


응? 분명 있었는데. 여짝으로 아빠가 지나갔는데. 아이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랐다. 대기는 이제 온통 안개로 뒤덮인 것 마냥 한 치 앞도 보기 힘들어졌다. 앞이 보이지 않자 아이는 겁이 났다. 그저 아빠의 손이 떠올랐다. 아빠가 사라진 쪽으로 아이는 보이지도 않는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아이의 몸이 붕 하고 떠오르더니 아이의 눈에서 세상이 고꾸라졌다. 그 고꾸라진 세상 그리 멀진 않은 곳에 왠 열린 문 하나가 언뜻 보였다. 문 너머로 무언가 일렁이는 검은 형상이 드러났다. 아이는 이내 기절했다.


#차이()

고향집에 머물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 지우야~. 꺄르르, 까꿍. 어데가노? 

- 꺄하~. 헤헤헤.


흔치 않은 엄마의 하이톤에 마당 쪽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애기였다. 한두 살 남짓되었으려나. 녀석은 유난히 맑은 미소로 보는 사람의 입꼬리를 올라가게 하는 재주가 분명 있었다. 눈길을 조금 옆으로 옮기자 애기 엄마가 보였다. 이국적이었다.


아이의 웃음에 기분 좋아진 엄마가 들어왔다. 묻지도 않았는데 나랑 눈이 마주치자 얘길 꺼냈다.


- 옆방에 새로 들어온 애기인데 혼혈이라 그런지 참말로 이쁘네. 

- 혼혈이라고요?

- 엄마가 베트남 사람이다 아이가. 한국말이 서툴러서 그렇지 참 착하데이.


용케도 내줬내. 내뱉을 뻔한 말을 속으로 겨우 삼키고 잠자코 엄마의 수다를 들었다. 나이 차 나는 남편과 방 보러 온 월남댁을 처음 봤을 때 다른 용모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선한 인상에 왠지 마음이 갔었더랬다. 게다가 이사 첫날 안고 온 딸내미는 엄마의 메마른 마음에 비를 내려 금세 유하게 만들었다.


- 이국적으로 생겼어도 아가 얼매나 이쁜 줄 아나. 참말로 귀엽데이. 


보수적이고 완고한 경상도 할매를 한순간에 팬으로 만들다니. 외국인이라면 질색팔색을 하던 몇 년 전의 그 여사님과 동일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자식도 못하는 걸 어린 네가 해내는구나. 두 모녀에게 존경심이 들었다. 속으로 나직이 읊조렸다.


- 아이야, 너의 차이에 상처 받는 일 없길. 지금처럼 환하게 크길 바라마. 아저씨가 그냥 고마워.


#이견()

말을 마치자 J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왠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거렸다. 내가 말을 잘못했나? 말투가 별로였나?


- 대충 제 설명은 이런데 이해되셨나요?

- 네, 어느 정도요. 선임님 말씀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요. 보내주신 메일이랑 설계 문서 보면서 코딩해볼게요.

- 보시고 이견 있거나 이해 안 가는 부분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주세요. 저도 틀릴 수 있으니까 이상하면 꼭 얘기하세요.


'어느 정도요'라는 말이 왠지 찜찜했지만 관두었다. 얘기도 안 끝났는데 고개를 끄덕거리며 연신 '네네'거리던 모습도 불편했지만 그냥 믿었다. 지나친 걱정과 오지랖은 꼰대의 지름길이다. 내 선배들이 내게 그러했듯 그냥 그에게 맡겼다.


며칠 후였다. 머야, 이거. 처음엔 설마 했다. 내가 잘못 설계한 건가? 문서와 설계도를 뒤져가며 비교했지만 틀리지 않았다. 동작을 확인하면 할수록 의심이 더해졌다. 결국 J의 코드를 직접 보았다. 망할. 이 XX 머지? 얼마 보지 않았어도 잘못되었단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보내준 설계도대로 구현하지 않았고 간단하게 코딩하라고 만들어준 코드는 전혀 쓰지도 않았다. 휴, 화라도 내야 하나. 한창 골이 나 있자 Y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Y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 J선임이 제일 중요한 걸 안 했네요. 모르면 물어봐야지. 

- 하아... 어쩐지 질문이 없다 했어요. 아니 설명할 때 표정이야 그렇다 쳐도 자기 일인데 이해 안 되면 물어봐야 정상 아닌가. 아무튼 결국 내가 뒤처리 다 해야 할 판이네요. 

- 양이 많아요?

- 다행히 그렇게 많지도 않아요. 하루 정도면 다 해. 휴우~ 가끔 짜증 나긴 해도 논리적으로 태클 걸던 분들이 그립네요.

- 이 바닥에선 다른 의견을 제대로 낼 줄 아는 게 실력인데 J선임은 아직 그걸 모르나 보네요. 힘내요.



Introduction of Song
Duke Jordan, Glad I Met Pat(Take 3)


가끔 엄마가 해맑은 얼굴과 밝은 목소리로 우리 집에 세들어 살던 혼혈 꼬마숙녀랑 놀던 모습이 생각날 때가 있다. 그런 엄마의 모습에서 어릴적 내게 듬뿍 사랑을 주셨던 외할머니를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해맑은 아이의 모습에서 앞으로 있을지 모를 차별에 대한 우려와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외국인에 대한 엄마의 막연한 편견은 아이의 미소에 녹아버렸고 월남댁의 선의에 어느새 온데간데 없어졌다. 편견이 사라진 자리에 이해가 자라 웃음꽃이 만발한 모습,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사실 혼혈이란 단어를 쓰는 것 자체도 불편하지만 단어 선택을 달리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이 글은 엄마와 아이 간의 정을 떠올리다 쓴 글이다. '기이'와 '이견'은 다름을 더 풍성하게 표현하고 싶어 추가한 글일 뿐 이었다. 아이는 부모를 따라 우리 집을 떠난지 오래지만 엄마는 가끔 그 아이 얘길 한다. 엄마의 변화에 신기해하며, 아이 엄마의 마음에 감사해하며, 그리고 아이의 미래에 축복을 빌면서 그때마다 난 Duke Jordan의 'Glad I Met Pat'을 떠올린다. 이 곡은 Duke Jordan이 뉴욕에 살 때 옆집에 살던 꼬마 Patrick을 떠올리며 쓴 곡이었다. 당시 Duke Jordan은 상당히 생활고에 찌들렸는데 옆집 아이의 존재에 위안을 받았나보다. 후에 그는 덴마크에서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덴마크에서 만든 첫 음반이 바로 이 곡이 수록된 음반 [Flight to Denmark]다. 재즈 명반에도 이름을 올리는 이 음반은 음반 사진의 이미지처럼 겨울이 어울리는 따뜻한 음반이다. 


'Glad I Met Pat' 외에도 이 음반에는 좋은 곡들이 많다. 두 곡 정도 추천한다. 'No Problem'과 'Everything happens to me'. Duke Jordan의 일생을 찾아보면 덴마크로 이주하기 전 미국에서의 삶이 꽤나 고단했던 모양인데 'No Problem'은 덴마크에서 그때를 왠지 반추하며 괜찮다고 자조하듯 음악으로 푼 느낌이 든다. 반면 'Everything happens to me'는 옛 시절의 좋고 나쁜 기억들을 흘려보내는 느낌이다. 인생이 그렇다. 지나보면 모든 추억들은 제각기 색깔을 띄며 마음 속에서 반짝인다. 기억에는 아픔이 없다. 다만 기억을 바라보는 현재의 내가 아파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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