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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비 Jan 11. 2019

악몽의 파도 속에서

가끔 그런 날이 있다. 기억 아래 묻어둔 오래 전 나의 잘못들이 한 순간에 우르르 쏟아져 하나하나 확인하며 다시 주워담아야 하는 날.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의 잘못, 사장에게 돌려야 하는 전화를 끊어버린다든가 하는 시덥잖은 잘못에서 좀... 큰 잘못도.
별 것 아닌 실수에서 비롯된 자책과 허술했던 스스로에게 돌리는 무거운 책임. 네탓이 아닌 내탓을, 반성이 아닌 후회가 덕지덕지 묻은 기억들.

모아놓고 보면 한가득인 실수들은 막상 하나하나 되짚어보면 몇 십 년을 살아온 것 치고는 꽤 드물지 않았나. 빙하를 달리는 펭귄 게임을 하면서 만나는 얼음구멍들처럼, 시간에 순응하며 저지른 실수들은 그리 무겁지 않게 던져놓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처럼 작정한 것 처럼 한 순간에 모두 기억나버리는 날에는 조금 힘들고, 버겁고, 눈 뒤에서 아른거리고, 눈을 감아도 떠으르고, 헛소리를 중얼거려도 입 안에 맴돈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아쉬운 기억은 한 순간에 증발해버리고 고통은 깊게 박혀 가끔 수면 위로 떠오른다. 잘 익은 봉숭아 씨방을 잘못 건드려 팡 하고 터트린 것 마냥, 잊고 잘 살다 아주 가끔 별 것도 아닌 일에 펑 하고 터진 악몽들은 기억 곳곳에 드러눕는다.

이제부터는 조금 힘든 순간이다. 잊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는 저 멀리 흩뿌려진 기억을 하나하나 주워담아 잘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때는 이러지 말았어야 했네, 저 때는 이렇게 할 수도 있었을걸. 이건 벌써 몇 번째야, 저건 그래도 두 번 다시 한 적은 없네. 너무 날것의 기억을 정리하는 일에는 많은 기운이 쓰인다.



실은 나도 그런 생각을 했다. 영화를 보면서 당장 꺼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서. 내가 너의 삶에 참견할 수는 있어도 내가 너의 삶을 결정할 수는 없다. 나는 너의 삶을 함께함과 동시에 네 삶의 영원한 타인이다. 나는 내가 네가 되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망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언제나 네 앞에 선다. 내 왼발과 네 오른발을 묶어 함께 걸어가는 것 보다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고 걷는 것이 쉽다.

오늘같은 날이야말로 네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잠들고 싶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우리는 서로를 위로할 것이다. 묵직한 날숨의 존재만으로 위로받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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