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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비 Feb 24. 2017

나는 절반의 중력으로 살았다

어떤 형태로든 사람은 변한다. 연인이 연락이 갑자기 끊겨 무얼 하는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평온을 유지한 채 일을 하는 건 내게 매우 낯선 상황이다. 보편적인 평온함이 낯설고, 내가 이토록 평온할 수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십 오년 전에는 분노로 가득했다. 별 것 아닌 데 화를 내고 보잘 것 없는 걸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십 년 전에는 텅 비었었다. 아무것도 담지 않으려 했고 간신히 담은 건 절대 놓치지 않으려 했다. 안달복달하며 에너지를 썼고 금방 지쳤고 금세 나가 떨어졌다. 

오 년 전에는 5센티미터쯤 붕 뜬 채로 살았다.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으려 했고 맘을 주지 않으려 했다. S와 연애를 마치고 조금 더 떠올랐다가, 거친 바람에 몸을 맡기고 목적 없이 부유한 채 살았다. 

결코 즐겁지 않았다. 동아리 Z에 적을 두고,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즐겁다는 생각을 했다. 연애를 하지 않아도 좋았다. 외로웠지만 쓸쓸하진 않았다.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무리가 생겼다. 조금씩 지면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발가락 끝 부터 천천히 닿았다. 뒤꿈치가 지면에 달라붙었을 때, 나는 첫 직장에 들어갔다.


뿌리내리고 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썩 좋지 않은 흙이었는지, 아니면 내 뿌리가 영 시원찮았는지. 첫 랑데뷰는 실패로 끝났다. 그렇다고 다시 둥둥 떠올라 지내지는 못했다. 한 번 내려앉은 건 다시 떠오를 수 없었다. 두려운 게 너무 많았다. 

사람을 또 만났고, 사랑을 하다가, 사랑인 줄 알았다가, 그저 요동치는 거센 파도였음을 깨닫고, 절반의 중력으로 삶을 뛰어다니다가, 어디까지 갈 까 하고 땅을 힘껏 박차오르려는데, 누가 내 발목을 탁 잡았다.


어, 어, 어. 하다가 천천히 내려와 땅에 섰다. 한참 고개를 들어야 얼굴이 보이는 사람이 흰 옷을 입고 희게 웃었다. 희게 웃는 사람이 좋았다. 파랗게 웃는 것 보다는 색채 없이 흰 웃음이 좋다. 내가 물들까 걱정하지 않아도 좋은 웃음. 혹여 내가 물들게 하지 않을까 하고 나를 조심스럽게 만드는 웃음. 너는 그런 웃음으로 나와 처음 만났다.


분명한 건, 그래 분명한 건 우리는 앞으로 10년을 함께해야 한다는 점. 

분명한 건, 삼 일 동안 네게 푹 젖었다는 점. 

분명한 건, 보름 뒤에 네가 올 날 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 

분명한 건, 네가 연락이 되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점. 

분명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삶을 평온하게 영위하고 있다는 점.


어쩌면 네가 내 삶을 헤집어놓지 못한다는 게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사랑은 혈투요, 전쟁과 같아서 너라는 존재가 나를 파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 할 것이다. 사랑은 피튀기지 않는 싸움이며 자기를 잃지 않으려는 경쟁이지만 그 너머에는 믿음이 있다는 말을, 너무나 진부하지만 나와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우리 집 마당의 작은 연못처럼 잔잔하고 고요한 그런 사랑도 사랑이라고 말 하고 싶다.


불과 한 달이 채 안 되는 과거에 겪었던 사건을 잊지 않았다. 어찌 잊을까,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잊고 있다. 당신 덕분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갈 곳 잃은 분노가 벡터를 찾았고, 모습도 바뀌었다. 감정은 참 신기한 것이라, 방향이 바뀌거나 목적을 찾는 순간 새로이 태어난다. 


네가 나를 잡아챈 순간과 내가 네 시간을 앗아갔던 순간. 평행을 달리던 두 삶이 단 한번 교차했던 그 점. 돌이킬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하기도 싫은 단 한번의 랑데뷰로 우리는 서로에게 깊이 뿌리내렸다. 네 손에서 뻗은 잔뿌리가 이미 내 마음 곳곳에 박혀 걷어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그랬을까, 네 외로움을 보듬어주고 있을까. 


이제는 중력이 사라져도 부유하지 않는다. 검은 힘이 사라져도 네가 있다. 너의 인력이 있다.

이제는 익숙해진, 낮밤을 바꿔 세 시간 뒤로 돌리면 네가 사는 시간을 만난다. 새벽, 여섯 시. 네가 너무 보고싶어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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