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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비 Jul 12. 2020

자정의 꽃

미안하다는 말을 열 번은 더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은 항상 일어난다. 나와 너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은 앞으로도 계속 우리와 부딪힐 것이다. 그 때 마다 미안하다는 말로 너의 감정을 털어놓아야 한다면 너는 견딜 수 있을까. 네가 조금 가벼울 수 있다면 좋겠다. 응당 가져야 하는 만큼의 미안함만, 그러니까 딱 이만큼만. 그랬으면 좋겠다. 네가 잘못한 일이 아닌 것들로 네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이 가장 슬펐다.


새벽 한 시 마감인 카페의 가장 마지막 손님은 너였다. 재킷을 뺀 모든 옷과 신발이 내가 골라준 것 들이었다. 셔츠와 타이, 팬츠와 슬립온, 붉은 모자를 살짝 눌러 쓴 모습에 조금 설렜다. 최근에는 이런 옷을 입었던 적이 없어서 그랬나, 낯선 익숙함에 배꼽이 간지러워졌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입을 맞추고 강물에 비친 벚나무 위를 걸었다.


흐드러지게 만개한 벚나무는 불광천을 따라 끝없이 이어졌다. 끝은 있었겠지만 우리는 그 끝을 보지 않았다. 네 손을 잡고 팔을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눈길로 목덜미를 핥기에 정신이 없었다. 어둠은 해가 뜨기 전 까지 제가 가진 장막을 풀어 세상을 덮는다. 그 아래에선 시간도 멎는다. 해가 뜨기 전 까지 시간이 멎은 것 처럼 하염없이 강가를 걷다가, 고요하고 묵직하게 가라앉은 강물에 벚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것을 보았다.

거울보다 더 선명한 반영에 홀린 듯 바라보다가, 징검다리 너머 네 손을 잡으러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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