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기억은 오래 남기로 해요
아무리 망한 연애라도, 아주 찰나의 순간 정도는 영영 잊고싶지 않은, 로맨틱하고 소중한 기억이 하나 쯤은 남는다. (아니라면 정말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군요)
당신과의 연애-물론 당신과의 연애가 망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에서도 그랬다. 우리가 아직 서로를 특별한 관계로 여기기 전, 몇 번 당신의 집에 초대를 받아 놀러가곤 했다. 같이 커다란 모니터로 영화를 보기도 하고, 유튜브를 보면서 수다를 떨었고, 당신이 하는 게임을 구경하다가 내가 재밌게 할 만한 게임을 골라주고는 내 엉망진창인 플레이를 보면서 서로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그리고 그 날도, 다르지 않았다. 컴퓨터 방에서 각자 의자 하나씩을 차지하고 마주보고 앉아서 시덥잖은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다. 보컬레슨을 받는다는 이야기, 무슨 노래를 연습하냐는 이야기, 제목을 말해줬는데, 나는 잘 모르는 노래라서. 한 번 불러줄까요?
좋죠.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눕다시피 앉아서 노래를 듣다가, 손을 마주잡고 만지작대다가, 노래가 2절로 넘어갈 즈음, 몸을 일으켜 네 어깨와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가장 가까이서 당신의 노래를 들었다. 조금 낮은 듯 하면서도 부드러운 당신의 음색은 내 귓가에서 달콤하고 귀여운 가삿말을 노래했다. 그게 내 입꼬리를 잡아당기기도 했고, 아무도 볼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당신의 온기를 온 몸으로 느꼈다.
이 세상에 아주 우리 둘 뿐인 듯 한, 온전히 외로우면서도 완벽하게 충만한, 그런 만족감이 나를 가득 채웠다.
노래를 제법 잘 하는 당신이었기때문에 그 순간이 더욱 낭만적이었던 게 아닐까. 그저 귀엽기만 할 수도 있던 순간이, 황홀한 순간으로 남아있을 수 있던 이유는 당신의 감미로운 목소리 덕분이었다.
그 후로도 종종 당신은 노래를 불러주었고, 보컬 연습을 하는 동안 녹음해 둔 파일을 전해주기도 했다. 언젠가는, 늦은 밤 나란히 누워서 온기를 나누고 있을 때, 문득 당신의 노래가 듣고싶어 청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 노래, 저기 의자에 앉아서 불러줬던 거, 한번 더 불러줘요.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가기로 한 후에 당신이 내게 불러준 노래는, 그 전보다 더 특별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딱 그때만큼 좋았다. 당신의 부드러운 음색도, 나의 말랑말랑했던 마음도.
사랑이라는, 매번 마법같은 감정에 우리는 바보같이 매혹되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영락없이 배신당해 복잡한 마음을 끌어안고 좁은 방의 문을 닫고 들어앉는다. 행복한 결말을 보장받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언제나 희망적인 미래를 생각하고, 우리는 그렇지 않을거야 하는 자기기만적인(!) 믿음으로 반복하는 모습이, 멀리서 보면 어떨 지 몰라도 나같은 사랑꾼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인생의 과업(?).
스포티파이가 추천해 준 플레이리스트를 듣다가, 당신이 불러준 노래가 흘러나와서, 언젠가 다시 만나 맛있는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지만, 다시 만나 이야기할 수 있을 날이 올까 하는 의문을 남긴 채 우리는 마침표를 찍었다.
생각해보니 당신이 불러준 노래 두 곡 모두 별에 대한 내용이었구나. 야경 보러 한밤중에 훌쩍 떠나자는 이야긴 몇 번 했었는데 막상 멀리 떠난 적은 없던 우리. 그래도, 손을 맞잡고 당신의 노래를 들었던 그 날 만큼은 마음 속에서 작은 은하수가 생겨났던 것 같아.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