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활짝 열었다. 가을볕이 거실로 쏟아져 들어왔다. 낡고 해묵은 생활감이 달라붙어있었던 집 안 내부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따뜻한 빛깔의 물감을 펴 바른 것 같았다. 먼지 쌓인 구석구석까지 환한 손길이 닿았다. 햇살은 차갑게 가라앉아있던 실내의 무거운 공기를 데웠다.
창 밖에 보이는 은행나무는 노란 가을옷을 입고 바람을 맞았다. 떨어져 나온 이파리들은 나비처럼 살랑거리며 날아다니다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두 주만 지나면 노란 나비 떼가 바람을 타고 춤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1월이다. 명학에서 맞이하는 가을은 매년 아름다웠다. 매번 봐도 질리지 않는다.
햇살은 가장 낮고 어두운 자리까지 빠짐없이 밝게 비춘다. 손바닥을 하얗게 물들이는 볕이 꼭 체온처럼 따스하다. 사람이 주는 환한 온기가 사라진 집에 묵은 먼지 같은 시간만 켜켜이 쌓였다. 감각은 사라져도 흔적이 남는다. 눈길이 닿는 자리마다 낡은 그리움이 버티고 앉아있다.
무심하게 내미는 손길이 잊고 지냈던 옛 기억에 닿았다. 작은 집인데도 혼자 있다 보면 공허한 느낌이 든다. 티브이를 켜고 음악을 틀어도 어딘가 텅 빈 것 같은 기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혼자서는 걷어내기 힘든 차가운 분위기가 감돈다. 식구들이 같이 살면서 만들어내는 온기는 자취를 감췄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식탁을 사용하지 않게 됐다.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를 앞에 두고 밥을 먹기 불편했다. 마음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무력감이 지배하는 일상에서 벗어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맞서서 가끔 이긴 적도 있지만 대체로 졌다. 승률은 우승할 가망이 없는 만년꼴찌팀 수준이었다.
침대 위에서 늦은 오후를 맞이하면 독한 숙취 같은 자괴감이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한참을 허우적대다 벗어나면 몇 년은 늙은 것 같은 참담한 기분을 마주해야 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오면 어느새 초저녁이다. 성실하게 하루를 보내고 귀가하는 인파 속에서 갈 길을 잃고 초라하게 발길을 돌렸다.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서 발 끝만 보고 있는 암담한 순간이 싫었다. 회의감이 가슴속을 헤집어놓으면 습관처럼 집안일을 했다. 우울감에 잡아먹히기 전에 몸을 움직였다. 사자를 피해 달아나는 영양이 된 것 같았다. 실패할 때도 있었지만 계속하다 보니 점점 익숙해졌다.
지저분한 책상을 정리하고 여기저기를 쓸고 닦았다. 마음을 대신해서 집이라도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그만큼 막막하고 갑갑했다.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을 잔뜩 끌어안고 있다 마지막에 글로 썼다. 감정은 휘발하지만 기록은 남는다. 최악이라고 여겼던 순간조차 몇 개의 단어와 형용사로 덤덤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됐다.
삶은 날씨 같아서 수시로 변화한다. 어디에도 정해진 결말은 없다. 무의미한 순간도 없다. 좋든 싫든 삶은 전부 경험이나 체험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보다 조금 익숙해졌다. 나아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숨통이 트였다. 집안을 정리하면서 하루에도 여러 번 환기를 했다.
초미세먼지가 극심한 날이나 세찬 비가 내리는 날을 제외하면 환기를 잊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공허감이 감도는 실내에 신선한 공기를 채워 넣었다. 그러면 내면의 불편한 감정도 조금 가벼워졌다. 미혹당하지 않는다는 나이를 의미하는 불혹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마음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다.
좋았다 나빠지기를 반복하면서 괴롭고 외로운 날들을 흘려보내고 있다. 차고 기우는 달처럼 희망이나 소망은 차오르면 아래로 흘러내린다. 예고 없이 돌변하는 내면의 계절에 언제쯤 적응하게 될까? 잘 모르겠다. 그래도 매일 밤 오늘과 다른 내일을 고대하면서 잠자리에 든다.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드는 사자가 두렵다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는 없다.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확인하고 곧바로 내려놓는다. 지루한 반복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딱 하루동안 버틸 수 있는 저항력이었다. 모르는 문제는 그냥 흘려보내기로 했다. 오늘 하루를 사는 것에만 집중한다.
햇살은 가장 낮고 어두운 자리까지 빠짐없이 밝게 비춘다. 손바닥을 하얗게 물들이는 볕이 꼭 체온처럼 따스하다. 사람이 주는 환한 온기가 사라진 집에 묵은 먼지 같은 시간만 켜켜이 쌓였다. 감각은 사라져도 흔적이 남는다. 눈길이 닿는 자리마다 낡은 그리움이 버티고 앉아있다. 무심하게 내민 내 손길은 잊고 지냈던 옛 기억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