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만 바라보고 있어도 기분 좋은 가을이다. 가을은 선물 같은 계절이다. 여름 내내 지친 몸과 마음에 달콤한 휴식을 선사한다. 좋은 날씨를 만나면 편지처럼 고이 접어서 간직하고 싶다.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는 날에 몰래 펼쳐서 작은 내 방을 가을로 채우고 싶다.
산책을 하면서 오늘 하루를 살아갈 작은 행복을 충전한다. 천천히 걷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걱정을 작게 조각내서 길 위에 버리고 돌아온다. 비울수록 삶은 가벼워진다. 두 손 가득 꼭 붙잡고 있었던 미련을 놓아버렸다. 투명한 바람을 타고 여기적 흩날리다 산산이 흩어졌다.
잠 못 이루는 늦은 밤 내내 걱정과 미련을 끌어안고 밤새 끙끙댔던 내가 초라해 보였다. 환한 가을볕에 낯부끄러운 지난밤을 씻어냈다. 매일 아침마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가슴을 비운다. 잔뜩 구겨진 원고지뭉치가 쌓인 쓰레기통 같은 마음을 털어버린다. 그리고 상쾌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핸드폰을 꺼내서 가을 아침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인화해서 내 방 거울 앞에 붙여놓고 싶을 만큼 예쁘다. 가을은 갈수록 짧아지고 있지만 아름다움은 그대로다. 진짜 아름다움 것들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가을을 좋아한다. 버릇뿐만 아니라 취향도 여든까지 간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물기를 머금은 공기에 풀냄새와 흙내음이 섞여있다. 패출리와 샌달우드를 베이스로 한 우디 노트 계열의 향수가 떠올랐다. 아파트 단지와 빌딩 숲 사이에 있는 공원은 작고 푸른 섬이다. 아스팔트 위를 쉼 없이 지나는 자동차들은 흐르는 물살과 같다. 해안가 모래밭에 앉아서 점점 멀어지는 파도를 눈으로 좇는 기분이 들었다.
느린 걸음으로 공원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도로 위를 지나는 차량행렬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범계역 옆에 있는 평화공원과 희망공원은 일 년 중 이맘때가 제일 예쁘다. 파란 하늘을 향해 쭉 뻗은 나뭇가지들이 곱게 물든 나뭇잎을 달고 있다. 하얀 햇살이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 사이로 물결처럼 반짝거렸다.
은빛 비늘을 달고 느리게 유영하는 해질 무렵의 강물을 닮았다. 노을을 머금은 윤슬은 선명한 은빛이다. 눈부심을 참고 넋을 놓고 계속 바라보게 만든다.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에 힘을 주고 햇살을 눈에 담았다. 못 참고 눈을 감았더니 까만 어둠 사이로 환하게 빛나는 잔상이 보였다. 주황빛 나비들이 우아하게 날갯짓을 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는 형언하기 힘든 풍경이나 장면을 나타낸 단어들이 존재한다. 게일어로 아보랄리스(Arboralis)는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반짝이는 햇살을 의미한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스코틀랜드의 가을을 상상했다. 위스키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의 스페이사이드는 단풍이 아름다운 고장이다.
책에서 본 스페이사이드의 풍경은 한국처럼 아름다웠다. 황금 들녘을 둘러싼 산맥과 언덕은 11월이 되면 붉은빛으로 가득하다. 케언고름과 모나들리아스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로 사람들은 좋은 술을 빚는다. 도토리 향이 나는 스페이사이드 위스키는 가을을 품은 술이다. 지구 반대편의 가을을 떠올렸더니 갑자기 하이볼이 마시고 싶어졌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한국의 가을을 보여주고 싶다. 내 고향 안양은 가을이 정말 아름다운 도시다. 지난 역사와 도시의 과거를 간직한 만안구는 추억이 곱게 물드는 옛 풍경을 품고 있다. 미래를 그리는 동안구는 선명한 빛깔로 계절감을 드러낸다. 사계절의 경계선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지만 그래도 가을은 가을이다.
발걸음 닿는 곳 어디든 전부 다 아름다운 계절이다. 올해는 긴 가을장마가 끝나고 가을이 더 짧아졌다. 오늘 아침기온은 영하 1도였다. 이슬 대신에 서리가 내리더니 욕실 유리창에 옅게 성에가 꼈다. 짧아서 소중하고 아쉬워서 매번 그리운 가을을 떠나보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