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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Jun 24. 2023

아토피

 늦둥이였던 나는 허약체질로 태어났다. 심하게 마른 데다 잔병치레가 또래 아이들에 비해 유독 심했다. 수업 중에 선생님이 안고 병원에 뛰어간 적도 있었다. 아토피는 유년시절 가장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던 질병이었다. 어른들은 아토피보다 태열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팔다리에 붉게 들러붙은 피딱지와 하얗게 일어난 각질을 감추고 싶어서 나는 긴 옷을 즐겨 입었다. 아토피는 계절을 가리지 않았다. 여름에는 땀띠와 함께 찾아왔고 건조한 겨울이 되면 피부 깊은 파고들었다. 엄마는  손을 잡고 좋은 병원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아토피 전문가라는 의사들을 만나러 지방의 병원을 다녀온 적도 많았다. 그런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아토피는 그림자처럼 내게 들러붙어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매일 밤마다  머리맡에 놓여있었건 하얀 약봉지가 생각난다. 녹색 십자가가 그려진 병원로고 아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얀 가루약을 먹기 싫어서 발버둥 치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500원짜리 동전만  분홍색 연고케이스 속에는 하얀 연고가 들어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나는  연고를 팔과 다리에  발랐다. 약효가  들어서 많이 호전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환절기가 되면 예외 없이 매번 병원을 찾아야 했다. 초등학생이 되기도 전에 나는 내가 남들보다 약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건강한 사람 되고 싶었지만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건강한 체질을 타고난 아빠는 외아들의 허약한 체질을 항상 걱정했다. 팔다리의 힘을 길러주기 위해 야외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도  변화는 없었다. 그저 내가 건강하게 자라는 것만을 바라며 아프지 않기를 원했다. 교회 집사님들이나 친척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어른들이 아픈 아이를 보는 시각은 똑같다. 명절되면 다양한 건강식품이 선물로 들어왔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를 위한 사랑과 배려라는 고 있었. 맛은 하나 같이 별로였지만 가능하면 먹으려고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아토피는 그전보다는  나아졌다. 여전히 심하게 마른 편이었지만 잔병치레는 많이 줄었다. 내가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보다 병원에서  이상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부모님은 훨씬  기뻐했다.


 부모에게 좋은 자식과 나쁜 자식은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대부분의 부모는 그저 아이가 아프지 말고  자라주기만을 바란다. 유년기의 내가 아파서 숨을 헐떡일 때마다 부모님  분은 밤새  곁을 지켰다. 아프지만 말라고 낫기만 하면  괜찮다는 말을 하면서 이마 위의 수건을 갈아주고 이불을 덮어줬다. 자라온 성장환경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사랑의 의미를 돌아볼 때마다 나를 포기하지 않은  분의 마음에 감사한다. 20대 중반부터 꾸준히 운동을 하면서 183cm  키와 건장한 체격을 갖게 되었다. 아토피는 완치가 없는 자가면역질환이지만 잘 관리하면서 별문제 없이 살고 있다. 간절했던 부모님의 바람이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은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선명해지면서 살아갈 힘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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