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상품명 혹은 브랜드명이 장르를 나타내는 대명사가 되는 경우가 있다. 게임계에서 주로 사용하는 로그라이크나 소울라이크라는 명칭이 대표적이다. 아넬형안경이라는 말도 이와 비슷하다. 오래전에 사라진 안경제조업체인 타르트의 대표모델 아넬. 많은 기업들이 클래식한 아넬의 디자인을 따라한 아넬형 안경을 만들고 있다. 한 때의 트렌드로 끝날 줄 알았지만 10년 넘게 이어지면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고가의 수제안경제조사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아넬형 안경을 생산하는 이유는 하나다. 아넬형 안경은 실패도 호불호도 없는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심미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클래식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소비되면서 살아남은 디자인. 이것이 클래식의 본질이다. 위대한 디자인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것이 위대한 것이다. 아넬형 안경은 전형적인 클래식 디자인이다. 각 브랜드의 정체성을 살려서 리뉴얼과 리파인을 가미하지만 본질적인 디자인은 변하지 않는다. 50년대에 출시된 안경의 오리지널리티를 지키면서 현재의 트렌드를 적당히 가미한다. 아넬형 안경은 그 자체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클래식한 디자인이 주는 편안함이 강점이다. 이런 편안함을 사람들은 어디에나 두루 잘 어울리는 무난함으로 받아들인다. 한마디로 호불호 없는 디자인이다.
아넬형 안경은 기업과 소비자 모두에게 만족감을 준다. 무난한 안경 디자인은 편안한 데일리룩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환영받는다. 꾸준한 인기에서 비롯되는 안정적인 매출은 안경브랜드의 든든한 캐시카우 역할을 한다. 최고급 소재를 활용한 핸드메이드 안경에 대한 관심과 수요는 패션시장의 성장과 함께 꾸준히 증가했다. 아넬형 안경은 이 과정에서 클래식한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는 데 성공했다.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할 아이템이 된 것이다. 소비자의 지속적인 수요는 기업의 안정적인 공급을 견인한다. 돈이 되는데 이를 마다할 기업은 없다.
이 과정에서 아이덴티티와 헤리티지를 내세우던 브랜드들까지 아넬형 안경을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두꺼운 아세테이트 시트를 사용한 투박한 안경으로 유명한 브랜드 이펙터. 핸드메이드 공정으로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가네코옵티컬. 개성이 뚜렷한 디자인을 보여주는 두 브랜드마저 아넬형 안경을 출시했다. 자존심과 정체성은 수익성 앞에서 한낱 고집에 불과하다. 이제 아넬형 디자인은 안경브랜드의 라인업에서 빠질 수 없는 제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선택에서 필수가 된 상황. 아넬형 안경은 클래식을 넘어 베이식이 된 것 같다. 기본이 아니라 근본으로 자리 잡았다는 표현을 써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