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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Apr 04. 2024

시암선셋

 어린 시절 주말마다 출발비디오여행이나 접속무비월드를 챙겨봤다. 요즘은 영화리뷰를 업으로 하는 유튜버들이 많지만 90년대는 아무것도 없었다. 혼자서 영화관을 갈 수 없었던 미성년자에게 영화 소개 프로그램은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김경식이 진행했던 영화 대 영화도 좋았지만 지나간 영화를 소개해주는 코너도 매력적이었다. 결말을 제외하고 5분 내외로 내용을 요약해서 보여줬다. 그때 본 영화 중에 기억에 남는 작품은 시암선셋이었다.


 컬러리스트인 주인공이 식사를 하면서 음식으로 다양한 색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신기했다. 영화 제목처럼 아름다운 석양이 등장하는 씬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하늘에서 떨어진 냉장고에 맞아서 아내가 사망하는 장면이 참 강렬했다.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어른들의 말이 떠올랐다. 새옹지마의 진짜 의미를 그때 제대로 이해했던 것 같다. 사람은 여객기 화물칸이 열리면서 자유낙하한 냉장고에 깔려 죽을 수 도 있다. 행운이 갑자기 찾아오는 것처럼 불행도 갑작스럽게 닥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삶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현실성 없는 극적인 연출 같지만 정작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IMF가 찾아오면서 재계 서열 2위 대우가 망했다. 중1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9.11 테러가 발생했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장면을 뉴스로 보면서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구 지하철 화재로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국보 1호 숭례문은 불에 타버렸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유한 재벌총수와 권력의 정점에 섰던 대통령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예상을 벗어나는 일들을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영원히 상승하는 안전자산으로 평가받았던 미국 부동산 시장이 하루아침에 붕괴했다. 미국이 독감에 걸리자 한국은 팔다리가 잘려나갔다. 주식시장과 서울 아파트 가격이 반토막 났다. 불황에서 가까스로 회복할 때쯤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인해 전쟁이 날 뻔했다.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mp3와 dmb, pmp, 내비게이션 같은 기기들이 사라졌다. 중동의 봄이 몰고 온 민주화 운동은 결국 내전과 테러로 얼룩졌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파면당했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는 사업가 출신의 리얼리티쇼 진행자가 대통령이 됐다.


 군비경쟁과 무역갈등으로 충돌하던 미국과 중국은 냉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21세기 최악의 사건으로 불리는 코로나19가 발생했다. 봉쇄와 단절 속에서 IT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코로나 종식과 동시에 시작된 AI혁명은 혁신과 문제를 동시에 가져왔다. 예측은 늘 빗나가고 예상은 쉽게 어긋난다. 계획대로 되는 일보다 계획을 벗어나는 일이 훨씬 더 많다. 사건과 사고는 늘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진다. 하늘에서 냉장고가 떨어지는 영화 속 장면보다 더 영화 같은 일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큰 사건들은 상식이나 법칙을 아득하게 벗어난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다들 미래를 궁금해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싶어 한다. 알 수 없는 미래에 관한 호기심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그러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점술과 역술에 기대서 불행을 대비하고 싶어 한다. 과학이나 종교를 신봉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기회를 잡으려고 준비하는 태도나 사건사고를 몰고 오는 불행을 대비하려는 마음가짐이나 똑같다. 둘 다 불안에서 비롯되는 욕망일 뿐이다. 불안과 욕망을 버리는 것이 곧 행복이다. 갑자기 왔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나는 것이 삶이다. 알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모른다고 문제 될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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