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뚝뚝한 아버지와 어색한 아들

by 김태민

김태민, <재회>, 달력커버에 크레파스, 18x26cm.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안아드렸다. 앙상하게 마른 늑골이 내 어깨에 닿았다. 강철 같은 몸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산처럼 커다란 뒷모습 역시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일흔을 넘긴 아버지는 머리에 하얀 서리가 앉은 노인이 됐다.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언제 했는지 모르겠다. 20대 후반에 크게 다투고 나서 미안함을 담아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는 다채롭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대체로 비슷하다. 아주 가깝거나 아니면 거리감을 품고 산다. 아버지와 아들은 가깝지만 먼 가족이다.


나는 아버지가 어려웠다. 불편하다기보다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한 지붕 아래 같이 살면서 서로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대화를 줄였다. 피한 적도 있고 못 알아듣는 척 넘어간 적도 있다. 반항하면서 아버지와 일부러 충돌하지는 않았다. 그냥 피했다. 해석하기 힘든 말과 납득하기 어려운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지만 관심을 보이거나 간섭하지 않고 살았다. 10년이 지나고 이제 거의 20년이 흘렀다. 나는 마흔을 목전에 둔 나이가 됐다. 그리고 아버지는 노인이 됐다.


어느 날 거울을 보는데 흰머리가 부쩍 늘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가 떠올랐다. 40대에 머리가 온통 하얗던 어린 시절의 아버지 모습이 거울 속 내 얼굴에 겹쳐 보였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가버렸다. 살아갈 날보다 남은 날이 적다는 사실이 와닿았다. 관계를 개선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간절함은 없었다. 습관이나 버릇처럼 세월은 사람에게 관성을 부여힌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생각은 간단했지만 행동은 쉽지 않았다. 여전히 아버지와 나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 온도나 태도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에 아쉬움이 점점 커졌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크게 후회할 것 같았다. 떠나는 사람은 납득하고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남는 사람은 잘해주지 못한 것들이 회한이 된다. 드라마 속에 나오는 좋은 아들 노릇은 할 수 없지만 말은 할 수 있다. 처음이 어렵다. 어색함은 잠깐이다. 지금 안 하면 이번에 놓치면 또 많은 날들을 흘려보내게 될 것이다. 용기가 필요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매일 주고받는 가족도 있지만 가슴속에 담아두고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있다. 한 마디를 꺼내는데 몇 번이나 망설였다. 그래도 결심을 굳히고 용기를 냈다.


아버지를 안아드리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익숙한 내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꼭 처음 하는 말처럼 어색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앙상한 늑골과 견갑골이 어깨에 닿았다. 나이 든 아버지와 지나간 시간을 함께 끌어안았다. 그동안 떨어져 있던 세월의 간격을 좁히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팔에 힘이 들어갔다. 가슴 깊은 곳에 얼어붙어있던 무언가가 눈 녹듯 풀어지는 것 같았다. 달라진 것은 없지만 이전보다 좀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웃으면서 고생이 많다고 내 등을 두드려줬다. 환한 미소를 정말 오랜만에 봤다.


그날 이후로 자주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여전히 어색하다. 아직도 어렵다. 하지만 용기를 내면서 삶은 조금이지만 달라졌다. 물론 우리 부자는 그대로다. 무뚝뚝한 데다 표현도 서투른 편이다. 극적인 반전이나 역전은 드라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픽션이다. 하지만 헤피엔딩은 현실에 존재한다. 조금이라도 전보다 괜찮아진다면 좋겠다. 그러면 행복할 것 같다. 작은 행복은 없다. 행복은 그냥 행복이다. 느리지만 점점 나아질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전보다 편해졌다.


가족은 늘 어렵다. 살면서 맺는 수많은 관계 중에서 가족이 제일 버겁다. 하지만 포기할 수도 없고 등을 돌릴 수도 없다. 태어나면서 맺은 혈연은 인연 중에서 가장 질기고 끈끈하다. 벗어나려고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받아들이려고 한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인정하고 지나간다. 이해하려고 필요이상으로 고통받을 필요는 없다.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서로 다른 인간이다. 같은 생각이나 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제 하나둘씩 내려놓는 중이다. 내 마음이 편해야 편안하게 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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