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선을 넘기 직전에

by 김태민
김태민, <화양연화>, 달력커버에 크레파스, 14x23cm.

선을 넘어갈 것 같은 순간이 있다. 한 끗 차이. 여기서 한걸음만 더 가면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본능적으로 느낄 때. 단념하고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표면장력을 깨는 물 한 방울처럼 충동이 이성을 앞지른다. 저지르고 나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머릿속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시뮬레이션해본다.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내 행동의 결과물이 만들어낼 파급효과를 가늠한다. 그렇게 잠시 상상해 보고 나면 마음이 좀 가라앉는다.


행동은 종류를 막론하고 용기를 필요로 한다. 충동적인 행동을 저지를 때는 용기에서 비롯된 결심이 요구된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 전에 스스로를 제지하는 것 역시 용기의 역할이다. 한 끗 차이로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면 결국 늘 후자를 선택하게 된다. 기분은 잠깐이고 감정은 날씨처럼 변한다. 소나기는 세차게 내릴수록 빨리 멎는다. 아무리 긴 장마도 여름을 넘기지는 않는다. 충동은 순간이다. 일상과 삶을 망가뜨리게 놔둘 수는 없다. 선을 넘기 직전에 발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원래의 내 자리로 돌아가기로 했다.


삶은 소망하고 희망해 온 것들의 총합이다. 손에 쥔 결과물이 초라해 보이고 걸어온 여정이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누구나 마찬가지다. 후회 없는 삶은 없다. 아쉬움 없는 선택이 있을까? 놓치고 잃어버린 것들을 두고두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삶은 우리에게 유일한 권한을 줬다. 선택지가 줄어들어도 결정권은 늘 나에게 있다.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고 현실도피하면서 자기 연민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흘려버린 시간은 언젠가 후회하게 된다. 작고 초라한 것은 없다. 모든 일은 의미가 있고 결과는 전부 고유한 가치를 품고 있다.

성공과 실패를 들먹이면서 숫자를 가지고 비교하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내가 나를 제일 미워하고 늘 비난했다. 나의 성공을 가장 많이 의심하고 나의 역량을 비웃었던 것도 나다. 그런 자신을 싫어해서 망가뜨리고 싶다는 생각을 품은 적도 있었다. 선을 넘어갈 것 같은 충동은 늘 내 안에서 시작됐다. 자기혐오는 늘 불안에서 나온다. 지나온 날들이 불안하고 앞으로 가야 할 미래가 불투명해서 매번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나를 미워하고 비난했다. 용기를 내서 핸들을 꺾었다. 가드레일 밖으로 튕겨져 나가기 전에 다시 돌아왔다.


옥상에 올라가서 고개를 꺾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일주일 내내 이어졌던 한파가 물러갔다. 골목과 길거리의 눈이 모두 녹았다. 오늘 낮기온은 영상이다. 볼에 닿은 햇살이 봄날처럼 따뜻했다. 투명한 겨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세상은 늘 아름답다. 찬찬히 살펴보면 하늘 아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내 마음과 눈이 흐리면 세상도 변한다. 죄책감과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나를 과녁 삼아 미움과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마음이 좋았다 나빴다한다. 날씨처럼 나를 향한 태도와 온도가 자주 변했다. 그래서 생각보다 자주 괴로워했다.


한동안 좋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쳐있었던 것 같다. 몸과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부정적인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선을 넘기 직전에 정신을 차렸다. 햇볕을 쬐고 맑은 공기를 마셨다. 빈 속을 든든하게 채웠다. 청소기를 한 번 돌려야겠다. 그리고 나가서 운동을 하고 땀을 흘리고 나면 한결 나아질 것 같다. 한 번씩 고비를 넘기거나 위기를 피하고 나면 안전장치를 점검한다. 소중한 사람들은 내 삶의 지지대다. 자존감과 자기애는 힘든 순간에 안전선 역할을 한다. 느슨한 벨트를 단단하게 조이고 헐거워진 마음에 기합을 불어넣었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방향을 틀고 일상으로 돌아와서 다시 삶에 도전한다. 지지부진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일을 반복하면서 계속 살아나간다. 반전도 역전도 없는 평범한 날들을 흘려보낸다. 회의감이나 공허감을 느낄 때도 있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늘 그랬듯이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벽돌처럼 쌓아 올린다. 차곡차곡 쌓은 계단은 언젠가 하늘에 닿을까? 너무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은 목이 아프다. 위가 아니라 앞만 봐도 된다. 반전이나 역전은 없지만 작은 변화와 뜻밖의 변수를 만나는 삶도 괜찮다.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17화좋았다가 나빴다가 날씨 같은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