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감정의 부스러기로 글을 짓다

by 김태민
김태민, <별바라기>, 달력 커버에 크레파스, 14x26cm.

쌀로 밥을 짓는 것처럼 감정의 부스러기들을 한데 모아 글을 짓는다. 버려지는 감정은 없다. 좋은 순간은 추억으로 아쉬운 순간은 기억으로 남아 글이 된다. 감정이 품고 있는 색감이나 온도는 모두 다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전부 다 과거라는 똑같은 꼬리표가 붙는다. 적당히 색이 바래고 알맞게 식은 감정을 꺼내서 들여다본다. 그때는 참 괴로웠는데 지금은 좀 괜찮아졌다. 한 번씩 날카로운 통증이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피는 멎었다. 상처 위에 반창고를 붙이듯이 글을 써붙였다.


말할 수 있는 아픔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고통은 내가 결국 살아남았다는 증거다. 삶을 등지고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명이다. 크고 작은 모든 사건은 시간이 지나면 다 글이 된다. 가끔씩 일기장이나 메모장에 남은 기록을 들춰보면서 살아온 날들을 돌아본다. 잘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잘 살아남은 것 같다. 과거를 회상해 보면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것들은 전부 나였다. 고삐 풀린 채 이리저리 방황하는 마음을 좀처럼 다잡을 수 없었다. 이유를 몰라서 내버려 뒀고 방법을 몰라서 괴로울 때마다 멀리 도망쳤다.


의무나 책임 앞에서 나는 늘 한없이 작아졌다. 1인분을 해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미워하고 무시했다. 그래서 외롭고 괴로웠다. 누구보다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살다가도 얼마 안 가 결심을 내팽개치고 오래된 그늘 속으로 숨었다. 작심삼일과 합리화를 반복하면서 매번 자괴감과 죄책감을 느꼈다. 티를 내지 않았지만 언제나 지쳐있었다. 나는 나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양극단을 오가는 마음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느라 항상 진이 빠졌다.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데 쓰는 에너지가 늘 모자랐다.


혼자 있는 시간을 늘리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었다. 가까운 이들은 종종 내가 사람을 밀어낸다고 말했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장벽을 세워두고 거리를 뒀다. 서로를 위해서 내린 선택이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부끄러운 감정들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매번 배려를 가장한 이기심을 내세웠다. 존중으로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포장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비웠다. 여러 번의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 철저하게 혼자가 됐다. 행복이나 안정 같은 단어는 밤하늘 구석에 보이는 흐린 별처럼 멀게 느껴졌다.


외로움과 괴로움이 쌓이면서 그 위로 공허감이 자랐다. 불현듯 꽃을 피우거나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슬펐다. 밤과 낮처럼 번갈아 찾아오는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을 떨쳐내지 못했다. 나이만 먹었다. 늘어나는 흰머리를 세어보면서 흘러간 날들이 다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성과가 나오지 않는 도전을 계속하고 있는 현실이 바보 같았다. 이상은 여전히 멀리 있는데 걸음은 갈수록 느려졌다. 시간은 벌써 이름을 바꿔서 세월이 됐는데 나는 늘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면서 바닥 아래 나락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쯤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손을 놓으면 편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사는 데 필요한 용기를 막상 죽는 데 쓰지는 못했다. 죽고 싶다는 말은 더는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의미다. 죽고 싶지 않았고 죽을 생각도 없었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 본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은 흐릿했다. 반대로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미래는 떠올릴 수 있었다. 다만 거기까지 가는 길을 몰라서 답답했다. 지지부진한 현실을 벗어날 방법을 몰라서 갑갑했지만 제대로 살고 싶었다. 잘 살고 싶었다.


매번 선택의 기로에서 삶을 선택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았다면 어떤 식으로든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목을 잡는 조급함을 버리고 어깨를 짓누르는 죄책감을 덜어냈다. 전보다 조금 나아졌다. 반전이나 역전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다. 변한 것은 없지만 살아가다 보면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뭐라도 해야 뭐라도 된다. 시간은 누적되고 세월은 퇴적된다. 감정의 부스러기를 모아서 글을 쓸 때마다 무의미한 삶은 없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모든 삶은 의미를 갖는다. 거기서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내 몫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이 품고 있는 의미를 가치로 바꾸고 싶다. 감정은 글이 되고 삶은 이야기가 된다. 행복했던 순간이나 힘들었던 기억을 모아서 기록으로 남겼다. 계절이 반복되듯이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하겠지만 삶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다. 계속하다 보면 그리고 계속 가다 보면 이정표를 만나게 될 것 같다. 그때가 되면 지금 이 순간을 돌아보면서 살아있길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19화우리가 힘들고 괴로운 진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