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나를 못살게 굴었다. 남을 탓하고 문제의 원인을 주변에서 찾는 것보다 나를 미워하는 것이 편했다. 매번 자책하고 나서 앞으로 잘해야 한다고 차갑게 다그쳤다. 내면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는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하지만 자신을 괴롭혀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책할 때마다 자존감은 깎여나갔고 무거운 죄책감이 마음을 짓눌렀다. 나를 밀어내고 늘 멀리했다. 소속감이나 안정감이 사라진 삶은 늘 외롭고 괴로웠다.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지도 못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늘 가면을 쓰고 살았다.
고민을 담아두고 혼자 끙끙대면서 힘들어했다. 그러다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면 멀리 도망쳤다. 현실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사실을 받아들일 만한 여력이 없었다. 부정하고 외면하는 무책임한 행동이 버릇이 됐다. 과거의 아픔을 정면으로 들여다볼 만한 용기가 없었다. 나이와 덩치만 늘었을 뿐 마음은 여전히 나약한 어린아이 같았다. 익숙해질 줄 알았지만 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달라지고 싶었다.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굳게 결심했지만 막상 큰 변화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문 앞에서 늘 발걸음을 돌렸다.
애써 잡은 문고리를 매번 놓쳤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늦지 않았다. 현실 앞에서 등을 돌리고 도망칠 때나 현실과 맞서 앞으로 나아갈 때나 똑같이 달린다. 그저 방향이 다를 뿐이다. 방향만 바꾸면 삶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늦었다고 단념하고 익숙한 선택지를 고른다면 반전은 없다. 이제까지 늘 그랬듯이 똑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달라지고 싶다면 지금까지 한 적 없는 선택을 하면 된다. 늘 포기하고 돌아섰던 지점에서 딱 한 걸음 더 내딛는다. 도망칠 때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손에 쥔 문고리를 똑바로 보고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한 번도 본 적 없는 역전의 발판이 놓여있었다. 단념하려는 마음을 거부하고 용기를 냈다. 살면서 처음으로 전문가를 찾아가서 심리검사를 받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들여다보기로 했다. 짙은 안개로 가득한 내면 속 어두운 심연을 직시했다. 결과지를 받아 들고 천천히 읽어 내려가면서 마음이 점점 가벼워졌다. 철저하게 포장하고 살았던 나만 아는 진짜 내 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났다. 거울로 알몸을 보는 것 같았다. 이제 더는 숨길 것이 없었다. 숨을 곳이 없는데 이상하게 편안했다. 외면했던 현실을 직면하고 나서 사실대로 말할 수 있게 됐다.
계기와 용기가 둘 다 필요했다. 지금까지 늘 하나만 손에 쥐고 고민하다 포기했던 것 같다. 한걸음만 더 내딛으면 되는데 그때마다 용기가 부족했다. 도망치는 것이 늘 익숙했는데 이제는 정말 그만두고 싶었다. 이번에는 달라지고 싶다는 마음이 전보다 훨씬 더 간절했던 것 같다. 살다 보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이 오는 것 같다. 시기가 빠르거나 늦을 뿐이다. 방어기제로 겹겹이 둘러싼 위장막을 걷어내고 나만 알고 있는 진짜 내 모습을 들여다봤다. 부끄러워서 숨기고 수치스러워서 감췄던 과거를 마주했다.
내가 문제로 치부했던 것들은 사실은 기질이나 성격에 가까운 것이었다.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기질과 성장환경에서 비롯된 성격을 두고 마냥 나쁘다고 여겼다. 나를 이해하는 대신에 오랫동안 오해했다. 들여다보지 않고 죽 덮어놓고 살았다. 두려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받아들여야만 다음 챕터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잘 못하면 배우면 된다. 실수나 실패는 잘못이 아니다. 무슨 일이든 능숙해지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후회하고 자책하는 버릇을 버리고 내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기온이 많이 올랐다. 햇살은 따뜻하고 공기도 적당히 포근했다. 신선한 바람을 맞으면서 스트레칭을 했다. 멀리 보이는 수리산은 아직 덜 녹은 눈이 쌓여있어서 희끗희끗하다. 그래도 봄이 오는 중이다. 오늘 낮기온은 11도다. 후드티에 얇은 패딩베스트를 입었는데 춥지도 않고 딱 좋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와서 좋아하는 책을 읽었다. 편안한 오후다. 매일이 오늘 같을 수는 없겠지만 평온한 날들이 쭉 이어졌으면 좋겠다. 큰 행복이나 극적인 행운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저 평탄했으면 좋겠다.
한 때 품고 살았던 강렬한 욕망은 이제 작은 욕심으로 변했다. 별 탈 없이 지내고 싶다. 사건이나 사고를 다 피할 수는 없겠지만 가능하면 무탈하게 살고 싶다. 바람일 뿐이지만 그랬으면 좋겠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하는 법을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내 일 뿐만 아니라 남의 일까지 낑낑대면서 끌어안고 살았다. 자주 실망하고 필요이상으로 괴로워했다. 더는 나를 탓하면서 자책하지 않으려고 한다. 마음에 담아두고 신경 쓰느라 고통받을 이유는 없다. 내가 손댈 수 없는 일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