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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자

by 김태민 Mar 16. 2025

 

 우리는 남보다 자신을 더 쉽게 오해하고 산다. 나도 나를 모르고 살았다. 불혹을 앞두고 뒤늦게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는 중이다. 스스로에게 참 무심했다. 남들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마음을 들여다보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외동인 데다 내향적인 성격이라 그랬던 것 같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다고 해서 자신을 잘 아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매번 문 앞에서 등을 돌렸다. 오래된 자물쇠와 붉은 얼룩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낡은 문을 열지 않았다. 그 사이 시간에 세월이라는 이름표가 붙었다. 이제야 문고리를 잡고 처음으로 문을 열어봤다.


 오래 전의 내 모습이 그 안에 박제된 채 남아있었다. 부정하고 외면했던 익숙한 얼굴이 나를 마주 보고 있다. 굳게 닫은 입술과 공허한 눈은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다. 나만 혼자 나이를 먹었다. 나는 과거의 나를 오해하고 미워하다 결국 외면했다.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심하게 자책했다. 비난의 화살을 가슴에 꽂아 넣고 저만치 앞서 나간 이들과 끊임없이 비교했다. 수시로 무력감을 느끼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무기력은 예고 없이 찾아와서 일상을 뒤흔들었다. 할 일을 미루고 무의미해 보이는 일에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다 무력감이 잦아들면 뒤늦게 죄책감이 급습했다. 그럴 때마다 범죄현장을 들킨 죄인처럼 후회하면서 자책했다. 무기력과 상반되는 긴장과 강박이 밀려들면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것처럼 진이 다 빠졌다. 공허감이나 허무감이 찾아오면 전부 다 그만두고 싶어졌다. 얼른 늙어서 삶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삶을 붙잡고 끌고 갈만한 여력이 내게 없는 것 같았다. 40대 후반까지만 살고 싶었다. 나이가 들어도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어느새 청춘의 전반기를 흘려보냈지만 반전은 없었다. 마음은 아직도 수시로 양극단을 오가는 중이다.


 높은 첨탑 사이에 걸려있는 가느다란 줄 위를 걷는 기분이 든다. 공허감과 강박감을 위태롭게 오가는 동안 내면의 체력이 바닥났다. 사람이나 일에 일관된 애정을 쏟는 것이 힘들었다. 나를 돌보는 것조차 힘겨웠지만 사람들에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몰랐다. 짐을 지우고 폐를 끼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오랫동안 나를 지배했다. 차분해 보이는 겉모습은 가면에 불과했다. 내 상태를 사실대로 표현하려는 의지도 없었고 현실을 받아들일 만한 용기도 없었다. 혼란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그저 밖으로 자주 눈을 돌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예술은 내가 붙잡을 수 있는 단 하나뿐인 동아줄이었다. 감정의 부스러기와 과거의 파편을 모아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한 마음이나 나조차 외면한 감정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익숙한 공허감이 찾아와서 애써 다잡은 마음을 흩어놓기도 했다. 긴 슬럼프를 겪으면서 마음을 닫고 산 적도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눈길을 외면했다. 그러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붓을 잡고 펜을 들었다. 지금은 밀린 방학숙제를 하는 것처럼 뒤늦게 나를 돌보는 중이다.


 나는 남들보다 느리고 남들보다 더딘 사람이다. 가만히 있어도 에너지를 많이 잡아먹는다. 연비효율이 떨어지는 자동차 같은 존재다. 수시로 방전되는 데다 회복력은 더디고 완충하려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책하는 행동은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전부 최선이었다. 이제까지 했던 모든 선택은 내게 맞는 최적화였다고 생각한다. 합리화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았으니 다행이다. 반전이나 역전은 살아있어야 찾아온다. 다 그만두고 자주 주저앉고 싶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목에 메달은 걸지 못했지만 완주할 수 있게 됐다.


 모범답안에서 한참 동떨어진 삶이지만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면서 살아왔다. 나를 아끼고 존중해주지 못했던 것 같다. 이해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오해했다. 이제는 나에 관한 오해를 풀기로 했다. 부정했던 것들을 인정했다. 무의식적으로 내가 한 일들을 종종 무의미하게 여겼다. 신념과 대치하고 있는 양가감정을 내려놓았다. 무의미한 일은 없다. 시간은 쌓이고 경험은 누적된다. 방황하면서 자기 파괴를 일삼았던 과거조차 글과 그림이 됐다. 진흙탕에서 연꽃을 피워냈으면서 꽃의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렸다.


 오해를 풀고 이해하려면 화해가 필요하다. 마음의 문을 열고 과거의 내게 악수를 건넸다. 지난 삶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걸어온 행적은 무가치하지 않았다. 삶의 흔적은 소재가 됐고 살아온 궤적은 기록으로 남았다. 내 멋대로 살았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고 내 식대로 살아남았다. 상담선생님은 내게 잘 살아남았다고 잘 살아왔다고 말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선택한 무의식적인 생존전략이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이야기했다.


 더는 비교하지 않는다. 가지 않은 길을 두고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잃어버린 것을 세는 것을 그만두고 남아있는 것을 돌아보면서 지금의 삶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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