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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갯속에서

by 김태민 Mar 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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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공기는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매일 보는 익숙한 풍경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짙은 안개가 자욱한 아침이다. 명학공원 너머 보이던 건물들이 안갯속으로 숨었다. 성결대와 수리산은 뿌연 장막이 완전히 가려버렸다. 흐릿하고 가느다란 윤곽선만이 나약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군포와 안양의 경계선인 안양고가교는 거대한 용각류 초식공룡처럼 보였다.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영화 <미스트>에 등장하는 거대한 괴수의 울음소리가 떠올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물방울 알갱이들이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눈은 모든 것을 덮고 비는 더러운 것을 씻어내지만 안개는 전부 다 품는다. 아름다운 것도 추한 것도 없다. 흰색과 회색 사이 어디쯤인 안개는 전부 같은 색으로 세상을 물들인다.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건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담쟁이를 심으라고 말했다. 안개는 금세 사라지지만 은밀하고 신비한 비밀을 품고 있는 느낌을 준다. 겁먹은 들짐승처럼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숨어있을 것만 같다. 여전히 나는 안개를 좋아한다. 짙은 안개를 보면 마음이 늘 편안했다. 초등학생 시절 살았던 덕천마을은 안양천이 가로지르는 동네였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간절기가 되면 가끔씩 하얀 안개가 천변을 뒤덮었다. 학교를 가려고 집 밖으로 나오면 낯선 세상이 펼쳐져있었다.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공기에서 가습기 냄새가 났다. 하얀 구름 속을 걷는 기분을 느끼면서 느리게 걸었다.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안개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뿌옇게 산란하는 신호등 불빛은 괴물의 눈 같았다. 안개는 기묘하면서도 신비로웠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편안했다. 안갯속은 고요했다. 새까만 밤하늘이나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를 좋아하는 이유도 비슷한 것 같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나 혼자 남아있는 것 같았다. 고요함 속에서 두려움과 편안함이 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느낌을 좋아했다. 사춘기를 앞두고 찾아온 심리적인 변화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그때 느낀 감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문득 사라지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가 있다. 짙은 안갯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안개와 한 몸이 되는 상상을 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물방울이 되면 어떤 기분일까? 아무도 모르는 낯선 세계로 넘어가는 문이 안갯속에 있다면 어떨까? 오늘처럼 안개를 만날 때마다 공상과 상상 사이를 오가는 망상을 한다.


 자동차배기음이나 사람들의 말소리는 안갯속에서 공허한 백색소음으로 변한다. 또렷하게 들리지만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투명하고 긴 꼬리를 남기면서 소리는 전부 안갯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해가 뜨면 안개는 지난밤의 짧은 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공허한 망상과 덧없는 환상도 함께 증발한다. 사라지고 싶다는 충동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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