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토요일은 냉장고 비우기를 실천하는 날이다. 오늘은 간식으로 하나 남은 오이를 먹기로 했다. 구매한 지 일주일쯤 지나서 약간 물러졌다. 보관기간이 길어지면 쓴맛이 난다. 확인하려고 살짝 썰어서 먹아봤는데 맛은 괜찮았다. 으깬 통후추와 맛소금을 넣고 섞어서 심플한 샐러드를 만들었다. 날 것으로 먹는 음식은 재료가 간소할수록 좋다. 첨가물이나 양념이 가벼울수록 본연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데치거나 익힌 채소는 소스에 찍어먹어도 맛있지만 신선한 채소는 간을 적게 해서 먹는다. 그래서 샌드위치도 소스를 거의 다 빼고 먹는다. 서브웨이 단골이었던 시절의 원픽은 후추 소금 올리브유를 넣은 햄샌드위치였다. 오이샐러드만 먹으면 심심해서 대파크래커를 곁들였다. 원플러스원 할 때 샀는데 기대한 것보다 더 맛있었다. 크래커 위에 오이샐러드를 얹어서 먹었다. 상큼한 오이향에 대파의 풍미가 잘 어우러졌다.
크래커의 기름기를 오이가 씻어내면서 끝맛도 텁텁함 없이 깔끔했다. 샐러드를 절반쯤 먹고 크래프트 크림치즈를 가져왔다. 거의 빈통이라 싹 긁어먹고 버려야겠다. 먹을 때마다 인류 문명의 가장 위대한 성과는 식품공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복잡한 화합물을 가지고 완벽하게 미각을 만족시킨다. 완성하는데 품이 많이 드는 음식일수록 기성품을 따라갈 수 없다. 첨가물이 잔뜩 들어가지만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가공식품의 맛은 독보적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인간은 우유와 분유를 먹으면서 가공식품을 접한다. 입맛은 다 거기서 거기다. 미슐랭쓰리스타 레스토랑만 다니는 미식가라도 콜라나 케첩을 안 먹고살 수는 없을 것이다. 잘 아는 맛이 무섭고 다 아는 맛이 곧 행복이다. 베이글과 크림치즈로 유명한 맛집에 간 적이 있다. 소분해서 파는 다양한 맛의 크림치즈는 베이글 한 개 값이었다. 치즈를 매장에서 직접 만든다고 했지만 기성품에 그저 재료를 배합한 것이었다.
풍미를 살리는 블렌딩노하우가 있겠지만 결국 맛은 베이스가 된 크래프트 크림치즈가 좌우했을 것이다. 잘 아는 익숙한 맛은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아이언맨 1편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햄버거가 나오는 씬이다.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당했던 토니스타크는 풀려나자마자 치즈버거부터 찾는다. 가공식품을 향한 인간의 욕구는 각인된 본능이나 마찬가지다.
신선한 자연식도 좋지만 풍미와 향미를 배가시키는 첨가물이 들어간 가공식품도 나쁘지 않다. 둘은 서로를 대체할 수 없다. 음식과 취향은 상호보완관계다. 입맛에 정답이나 오답이 없는 것과 같다. 음식은 죄가 없다. 과식이나 편식 같은 문제는 먹는 사람의 식습관에서 비롯된다. 크림치즈를 찍어먹었더니 맛이 더 좋아졌다. 부드럽고 풍부한 유지방이 오이와 크래커 사이의 부족한 빈틈을 메웠다.
산뜻함과 고소함을 부드러움이 감싸 안는다. 합이 제법 훌륭하다. 이번 주 냉장고 비우기도 성공했다. 세일코너에서 채소를 잔뜩 사다 보니 자꾸 남는다. 금방 쉬는 콩나물이나 숙주는 이제 조금만 사야겠다. 어제는 숙주복음을 잔뜩 만들어먹었다. 보관기간이 그나마 긴 오이를 좀 더 사야겠다. 5월은 오이가 맛있는 달이다. 6월까지 맛있다. 당분간 오이샐러드를 자주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