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산책],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고]
[봄산책]
오래간만에 날씨가 맑았다. 이제 진짜 봄이 오나 싶은 포근하고 달짝지근한 날씨다. 아마 근처에 솜사탕이 있었다면 나는 기꺼이 하나 사 먹었을 것이다. 맞다. 이런 날에는 산책을 해야 한다. 비타민 D 보충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들먹이며 회사 동료를 꼬셔 산책을 나섰다.
그날은 일이 있어 오랜만에 정장을 입은 날이었다. 자주 입지 않아 더 어색하다. 예전에는 어떻게 넥타이까지 야무지게 목에 두르고 다녔던 걸까? 자주 정장을 입지 않으니 바랜 구두도 새로 살 일이 없이 계속 신는다. 굽을 한번 갈았더니 아직 쌩쌩하다.
화창한 날씨에 매혹되어 산책에 너무 몰입하게 되면 현실감각이 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오래된 구두가 내는 걸음소리는 직장인으로서의 내 현실과 몽상을 연결해 주는 좋은 연결끈이 된다. 나는 너무 바스러져 풍경 속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햇살 나부끼는 거리에 스며들어 보려 애써 본다.
정처 없이 걷다가, 조계사에 들렀다. 곧 부처님 오신 날이어서인지, 연등 장식물이 절을 수놓고 있었다. 우리처럼 산책 나온 직장인 무리가 거의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절 관계자 및 불교 신자, 관광객들이다. 여유로움과 분주함이 공존하고 있다. 시내에 있는 절인 탓에 절 고유의 고즈넉함은 잘 모르겠으나 사람들의 마음 하나하나가 둥둥 떠다니듯 그 나름의 절실함이 느껴진다.
그러게.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사찰'이라는 공간은 이질적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무교인) 나와 나의 정장과 손에 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더 이질적 일지 모른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서, 우리는 각자의 시선으로 각자를 바라보고 있지만 또 서로를 침범하지 않으려 한다.
사람이 많은 탓에 구둣소리가 들리지 않아 나는 잠시 동화될 수 있었다. 연등 장식을 투과하여 다채로워진 봄 햇살 덕분이기도 하다.
향 냄새가 난다. 나는 사람들이 향을 피우고 소원을 비는 장소에서 잠시 커피를 내려놓고 향을 피워 보았다. 그리고 합장하여 가족들과 내 주변사람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해 본다. 짧은 5초 정도의 합장과 눈을 감고 잠시 고개를 숙이는 행위는 내가 비록 속할 수 없지만 이곳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아름다운 공간에 대한 감사의 표시다.
공간은 장소를 분절한다. 사람들은 분절을 좋아하나 보다. 구획을 나누고, 네 편 내 편을 나눈다. 명확하지 않거나 정해지지 않는 것에 불편해한다. 정해진 복장을 강요받다 보면 우리는 언젠가 우리의 표정까지도 강요받을지 모른다.
우리가 다른 것이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분절되지 않고 그저 구두소리처럼, 흐릿하고 상징적인 작은 구분자만 있는 것도 좋겠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려 해 봤자 지나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과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앞으로의 우리 인생을 바꿀 수는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미 지나간 것을 지나가지 않은 것으로 돌이킬 수는 없다.
삶을 바라보는 인식에 너무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야겠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위해 지나간 것에 대한 인식이나 스토리텔링 같은 것들에 너무 꽂히다 보면 지나간 것을 적확하게 기억하는데 혼란이 생긴다.
지금 나의 인식 또한, 언젠가 다가올 미래에는 그릇된 것일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언제나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왔다. 아마 과거의 나도 그러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진심으로 삶을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