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나는 돈을 벌 형편조차 안 되는 처지였다.
스무 살의 청춘이라 하기엔,
키 175에 체중은 겨우 40kg 남짓.
몰골은 마치 아사 직전의 남자아이 같았으니,
나를 고용할 만한 가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나마 할 수 있었던 일은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는 예식장 식당 알바.
매주 알바생이 바뀔 만큼 고된 일에
힘없는 나는 더 버거웠다.
큰 쟁반에 남은 음식을 쌓아 옮기기조차 힘겨워
겨우 일주일을 버티고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학기 중에는 부모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1994년, 그 시절 물가는 하루 한 끼에 2천 원,
교통비는 편도 천 원 정도였다.
어머니는 늘 형편이 어려우셨지만,
어떻게든 학교에 가는 나에게 5천 원 한 장을 쥐여 주셨다.
청량리에서 수원까지 왕복 교통비를 제하고
하루 한 끼 먹으면 손에 남는 건 겨우 천 원.
그 천 원을 난 매일 모았다.
배가 고팠지만, 그보다 더 간절한 꿈이 있었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김광민 교수님의 콘서트.
몇 달을 꼬박 모아 드디어 티켓을 샀다.
가장 싼 자리,
맨 뒷자리 중에서도 가장 끝자리에 불과했지만,
그 피아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콘서트 날,
피아노의 첫 음이 울려 퍼지자
배고팠던 그 시절,
모은 돈을 꼭 쥐고 있던 내 손의 떨림이 그대로 떠올랐다.
눈앞의 무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선율만은 또렷하게 내 마음에 새겨졌다.
김광민의 “지구로부터 온 편지”,
그 피아노 소리가 내 삶의 배경음악처럼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직장을 다니고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내가 품었던 그 작은 사연을 알고 있었던 아내는
어느 날 깜짝 선물을 내밀었다.
김광민 교수님의 콘서트,
이번에는 제일 앞자리 티켓이었다.
그날,
같은 피아노 선율을 다시 들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나의 곁엔 사랑하는 아내가 함께 있었고,
피아노 소리는 한층 깊어져 있었다.
내 마음에 새겨진 피아노 소리가
이제는 과거의 외로움이 아닌,
우리 둘만의 이야기로 흘러나오는 듯했다.
그날 이후로,
종종 음악 스트리밍으로 김광민의 “지구로부터 온 편지”를 함께 듣는다.
그 피아노 선율은 여전히 변하지 않지만,
내 마음에 남은 그 울림은
매번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