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lo Almendrado | 아몬드 소스를 입힌 닭요리
토요일이었어요. 오전부터 한시 반까지 수업이 있는 날이에요. 제 주업이 영어강사이니까 명백하게 일인데도 회화수업은 재미있어서 일로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아요. 그래도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되면 늘 엉덩이가 들썩거려요. 알피가 이번엔 또 무슨 레시피를 준비하고 있을지 궁금하거든요.
전철역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며 알피에게 전화를 했어요. 알피는 제 전화인 줄 알면서도 공손하게 전화를 받아요.
"네 여보세요"
"알피야"
"네 자연아"
늘 이렇게 시작하는 대화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화를 끊을 때마다 "안녕히 계세요"라고 해서 우스웠는데 지금은 "조심히 와"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할 줄 알아요.
알피가 저에게 바게트를 사 오라는 미션을 주었어요. 바게트는 한국에서 그다지 인기 있는 빵이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늘 무화과 깜빠뉴를 사 먹는 단골 빵집에 갔지만 미니 바게트에 크림을 잔뜩 끼워 넣은 빵만 있네요. 혹시 크림을 안 넣은 바게트를 살 수 있을까 물어봤는데 오늘은 더 이상 만들지 않는대서 빈손으로 나왔어요. 알피에게 전화를 했더니 알피가 말했어요.
"파리바게트 가봐! 설마 파리바게트에 바게트가 없진 않겠지"
왠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바로 옆이니까 가봤어요. 빈 바구니만 남아있네요. 어쩔 수 없죠. 아까 그 빵집으로 돌아가 아쉬운 대로 치아바타 빵 두 개를 사서 집에 돌아왔어요.
오늘은 <Pollo Almendrado>를 만들 거예요. 'Pollo'는 스페인어로 닭이고 'Almendra'는 아몬드예요. 아몬드 소스를 입힌 닭이 되겠네요. 그래서 전날 토실토실한 닭다리 여섯 개가 들어있는 팩을 사 왔죠. 먼저 닭고기 위에 소금과 후추를 티스푼 하나 정도씩 뿌리고 라임 하나를 즙으로 짜서 뿌린 뒤 냉장고에 한 시간 정도 두어요. 그럼요. 멕시코 요리에 라임이 빠질 순 없죠.
닭을 기다리는 동안 토마토 두 개를 큼직하게 썰어서 기름을 두르지 않은 팬에 구워요. 이제 소스를 만들 거예요. 늘 그렇듯이 다이애나 할머니의 레시피대로 했다가는 6인분이 나오기 때문에 3분의 1로 줄여서 만들어요. 통후추 두 알, 정향 하나, 월계수 잎 하나, 물 30ml를 소금 약간과 함께 블랜더에 넣고 갈아요. 그리고 아까 구운 토마토를 하나씩 넣으면서 계속 가는 거예요.
알피가 "재밌는 거 네가 해" 하면서 아몬드 껍질을 까는 두번째 미션을 주었어요. 아몬드를 매일 먹으면서도 껍질이 벗겨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안 해봤는데 신기하게 뜨거운 물에 불리니 퉁퉁 불은 손가락처럼 되어서 껍질이 쉽게 분리가 돼요. 미끄덩거리는 아몬드 밑부분을 손가락으로 힘 있게 잡으면서 꼬집으면 벌거벗은 아몬드가 완두콩처럼 톡 하고 튀어나와요. 어떤 아몬드는 껍질을 손톱으로 까야 벗겨지기도 하는데 조금 하다 보니 손가락도 아프고 슬슬 지루해졌어요. 알피는 분주하게 다른 것들을 하고 있는데 왠지 알피가 하는 게 더 재미있어 보여요. 어렸을 때 귀찮은 일 동생 시키고 싶을 때 "이거 진짜 재밌는 거야"하고 꼬시곤 했는데 왠지 딱 그 짝인 것 같아요. 인상을 팍 쓰면서 알피를 불렀어요.
"재미없어"
파업사태가 벌어지자 알피가 이어서 남은 아몬드를 깠어요.
이제 이 아몬드가 노릇노릇해질 때까지 볶는 거예요. 이때 사실 다이애나 할머니의 레시피를 그대로 따르자면 돼지비계를 써서 볶았어야 하는 건데 당장 그걸 사러 정육점에 가자니 덥고 멀어서 올리브유와 버터로 대신했어요. 알아요. 반칙이죠. 앞으로도 돼지비계를 기름으로 쓰는 레시피가 꽤 많아서 내일쯤 정육점에 가서 충분히 사 오려고 해요. 아까 사 온 치아바타 빵도 버터를 올려서 같이 구워요.
"빵은 나중에 같이 먹는 거야?"
"아니. 아몬드랑 같이 소스에 갈아서 넣을 거야"
"잉? 빵을 갈아먹는다고?"
희한한 레시피예요. 이 맛있는 치아바타를 다른 재료들과 함께 무자비하게 갈아버린다니. 괜히 아쉬워서 노릇하게 구워진 작은 조각을 얼른 한 개 집어먹었어요. 알피는 정말 빵과 아몬드를 토마토소스가 있는 블랜더에 넣고 싹 다 갈았어요. 빵과 아몬드가 들어가자 묽었던 소스가 걸쭉해지더니 곧 크림처럼 헤비해졌어요. 아몬드 소스 완성!
이제는 닭과 소스를 함께 180도로 맞춰둔 오븐에 넣고 45분 정도 요리하는 일만 남았어요. (오븐이 작아서 프라이팬에 먼저 해봤는데 소스가 부침개처럼 익어버리길래 곧 오븐에 넣었어요) 먼저 소스를 밑에 잘 깐 다음에 닭다리를 하나식 올리고 닭이 다 덮일 정도로 소스를 잘 부어요. 순식간에 닭다리 무덤이 완성되었어요. 언뜻 봐서는 인도의 버터 치킨 같아요. 이번에는 매운 고추나 치뽀뜰레가 전혀 안 들어가고 아몬드와 빵을 넣었으니 어떤 맛일지 궁금해서 자꾸 시계를 들여다봤어요.
드디어 알피가 오븐을 열고 닭을 꺼냈어요.
"소스가 너무 된 것 같아. 빵을 조금 덜 넣을걸"
소스가 살짝 퍽퍽해 보여요. 치아바타 한 개 반을 넣었으니 그럴 법도 하죠. 아니면 돼지비계 대신 버터와 올리브유를 써서 그런 걸까요. 그래도 냄새는 좋아요. 제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알피가 최선을 다해 소스를 올렸어요. 그러나 아무리 요리조리 찍어보려고 해도 소스가 뭉텅이로 붙어있다 보니 아주 먹음직스럽게 나오지는 않네요. 뭐 어때요. 맛만 있으면 그만이죠.
닭다리에 소스를 듬뿍 찍어서 한 입을 크게 베어 물었어요. 사실 이건 닭다리 자체가 한몫하네요. 이렇게 촉촉하고 육즙이 터지는 닭다리는 또 처음이에요. 그리고 소스는 정말 버터 치킨과 비슷했어요. 다른 점이 있다면 아몬드의 고소하고 부드러운 풍미가 더 부각되는 맛이었지요. 매운걸 잘 못 먹는 우리도 이번에는 청양고추를 잘게 썰어서 함께 넣어먹었는데 궁합이 딱이었어요. 참, 시원한 맥주를 빼놓을 수 없죠. 주황빛 소스와 닭의 하얀 속살이 화창한 여름날과 잘 어울렸던 늦은 점심식사였어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알피는 오늘의 점심인 치킨 수프를 만들고 있어요. 제 글이 알피의 요리 속도보다 한 박자 느리네요. 분발해야겠어요.
요리할 때 가장 행복한 멕시코 남자와 맛있게 먹고 글 쓰는 게 세상 가장 즐거운 한국 여자가 함께 삽니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에서 영감을 얻어 다이애나 할머니의 멕시코 가정식 레시피를 매일 하나씩 만들어 감탄하며 먹고 기록합니다.
Recipes from Diana Kennedy X Alfie cooks & Jay wr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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