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전이 멕시코 가정식이었다니

Chiles rellenos | 고추전의 멕시코 버전

by 제이조이


매주 목요일은 북클럽 모임이 있는 날이에요. 이 날은 한 나이지리아 여성의 TED 영상을 보고 시작했던 토론이 인도와 멕시코, 그리고 한국의 역사와 정치, 경제 이야기로 이어졌어요. 요즘 분노했던 여러 사건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내가 분노하고 있는 대상은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실제로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문득 내가 속해있는 사회와 그 현상, 그리고 뿌리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제대로 알아야 정확한 대상을 지지할 수 있고 부당하다고 느꼈을 때 화를 낼 수도 있는 거니까요. 어떤 게 좋다면 왜 좋은지, 싫으면 왜 싫은지 정확하게 설명하고 싶어 졌어요. 그래서 8월에는 역사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집에 돌아와서는 H가 추천해준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를 봤어요. 생각이 더 많아지는 밤이었지요. 뒤척이는 저에게 알피가 졸린 목소리로 말했어요.


"우리의 몸은 작은 우주야. 태양 주변을 따라 행성들이 움직이고 지구가 자전을 하듯이 우리는 숨을 쉬면서 몸 안의 뇌와 장기에 산소를 공급하고, 심장이 뛰고 피가 돌고 소화를 시키고 과거를 생각하고 현재를 살고 미래를 계획하고. 이 모든 걸 동시에 해나가고 있잖아.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어"


그 말을 들으며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잠에 들었어요. 그 말이 아침에 일어나도 생생하게 기억나더라고요. 그런데 저의 소우주에 살짝 균열이 생겼는지 두통으로 고생 중이에요. 아무래도 냉방병인 것 같아요. (이래서 여름이 싫어요) 카페에서 글을 쓰는 지금도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 위로 에어컨 바람이 쏟아지고 있어요. 이러니 병이 날 수밖에요.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오늘 먹었던 Chiles rellenos에 대해서는 꼭 써야겠어요.







금요장터가 열리는 날이라 늘 사 먹는 술떡과 사과와 토마토를 사려고 빈 가방을 하나씩 둘러매고 나왔어요. 그런데 입구 쪽에 큼지막한 연둣빛 고추가 가득 담긴 포대가 눈에 띄었어요. 멕시코에는 자그마치 64종이 넘는 칠레(chile 고추)가 있대요. 그중에 사람들이 평소에 먹는 건 20종 정도 되고요. 한국에도 지역마다 다양한 고추가 있지만 사실상 시중에서 찾을 수 있는 고추는 크게 오이 고추, 꽈리고추, 청양고추, 홍고추 정도였어요. 그런데 집 앞에서 새로운 고추를 발견했으니 알피가 얼마나 신났겠어요. 알피는 "칠라카!"하고 외쳤어요. 한국에서는 이게 무슨 고추냐고 물어보니 당조고추라고 해요. 혈당조절에 좋기로 유명하다는데 처음 봤어요. 알피가 생각하는 칠라카가 이 당조고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크기나 색깔이나 맵지 않은 맛이나 비슷한 것 같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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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는 길에 두부도 한 모 샀어요. 늘 그렇듯이 전 알피가 뭘 만드려고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 신이 나요. 집에 오자마자 알피는 달군 프라이팬에 고추를 굽기 시작했어요. 그리고는 앞 뒤로 다 구워져서 군데군데 까맣게 그을린 고추를 비닐봉지에 안에 넣어 그대로 냉동실에 집어넣었어요.


"오늘 재미있는 거 만들 거야"


저의 미션은 고추의 얇은 겉껍질을 벗겨내는 거였어요. 구워서 냉동실에 5분 정도 두었더니 촉촉해져서 껍질을 분리하기가 쉬웠어요. 이전에 아몬드 껍질을 까던 신공을 발휘해 여섯 개를 다 깠어요. 뒤를 돌아보니 알피가 밀가루랑 계란을 준비하고 있어요. 아, 이제 뭘 하는지 알 거 같아요. 고추전 비슷한 걸 만드는 거예요. 속은 두부로 채우고요. 그런데 계란옷을 만드는 방법이 좀 특이해요. 먼저 계란 흰자와 소금과 식초 한두 방울을 믹싱 볼에 담고 힘차게 저어 휘핑을 해요. 그러다가 나중에 노른자를 넣은 다음에 계속 저어요. 휘핑을 하면서 공기가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대충 저으면 안 되고 힘차고 빠르게 저어야 하는데 정말이지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어요. 그런데 팔이 너무 아파서 조금만 쉬려고 멈추면 귀가 밝은 알피가 소리치는 거예요.


"Don't stop!!!!!!!"


"이 씨!!!! 팔 아프단 말이야!!!!!!"


알피는 멈추지 말고 계속 저으라고 난리고 저는 소리를 지르면서 분노의 휘핑을 계속하다가 갑자기 목이랑 어깨가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아 다 팽개치고 누워버렸어요.


"우리 휘핑기 사자!!!"


제가 외쳤어요. 그랬더니 알피가 또박또박 한국어로 대꾸해요.


"괜찮아요. 아내 팔 있어요"


이상하게 알피의 한국어가 늘어갈수록 제가 불리해지는 느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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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바탕 전쟁을 치르면서 휘핑을 했더니 확실히 공기가 자글자글하게 들어가서 쫀쫀한 거품처럼 되었어요. 이제 반을 가른 고추 안에 두부를 길게 잘라 채워 넣은 뒤에 밀가루에 한 번 굴리고 계란 거품 옷을 입혀요. 그리고 조심스럽게 튀겨내는 거예요. 그 위에 소스를 얹어서 먹으면 완성이에요. 참, 소스는 양파와 마늘, 토마토를 물 한 컵 정도와 함께 갈아서 기름을 두른 팬에 부어서 익혀요. 그러면 물이 섞인 소스가 기름 위에 떨어지면서 쏴 하고 큰 소리가 나는데 이런 요리법을 Sofreir(소프레이)라고 해요. 멕시코에서는 흔한 요리 방식이라 살사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만든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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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les rellenos는 부드럽고 건강한 맛이 났어요. 땀을 흘려가며 먹으니 감기도 싹 달아나는 느낌이었어요. 특히 이번에는 고기 종류가 들어가지 않아 채식을 선호하시는 분들에게도 괜찮은 메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계란과 기름으로 튀겨낸 거라 비건 식단에는 맞지 않겠지만요. 이제 곧 점심을 만들 시간이에요. 밖에 비가 많이 오네요. 모두들 건강한 여름을 나시길 바라요.





요리할 때 가장 행복한 멕시코 남자와 맛있게 먹고 글 쓰는 게 세상 가장 즐거운 한국 여자가 함께 삽니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에서 영감을 얻어 다이애나 할머니의 멕시코 가정식 레시피를 매일 하나씩 만들어 감탄하며 먹고 기록합니다.

Recipes from Diana Kennedy X Alfie cooks & Jay writes

Instagram @jogum_str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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