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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Jun 22. 2022

서른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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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또 술마시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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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서른살이 대단히 많은 나이라고 생각했다. 외고에 가기 위해 그야말로 전력을 쏟아내던 중3 시절. 특목입시학원에선 20대 중-후반 선생들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제나이같지 않게 퍽 늙은 티를 냈는데, 그래서인지 나를 예뻐하는 선생들이 좀 있었다.


그 중 한 선생과 얼마전에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 나를 기억하냐는 물음에 네이버 기자페이지 구독 캡처를 곧바로 보내더라. 혼자서 좋아하고 있었다면서. 세월이 흘러서 16살짜리였던 나는 이제 서른살이고, 직장생활도 3년차에 접어들었다고 고했다. 너희가 서른이냐면서 깜짝 놀라는 선생. 이십대 후반, 지금의 나보다도 동생이던 그 시절 선생의 싸이월드 셀카에 '서른즈음에' 가사를 댓글로 달고 큭큭대던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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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손에 꼽게 좋아하는 술집 이름도 '서른즈음에'다. 서촌에도 같은 이름의 술집이 있다곤 하던데, 무튼 내가 다니는 곳은 신촌 골목에 있다. 교수님들이 학교다닐 시절에도 있었다니 아주 유서깊은 술집일 게다.


이집의 시그니처는 '디락'이라고도 불리는 '데드락'이다. 레드락 생맥주에 데킬라 샷 하나를 타서 마시는 술이다.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도수가 상당하다. 멋도 모르고 벌컥벌컥 마시다가, 2차로 옮겨간 플스방에서 많이도 졸아댔지.. 레드락 맥주가 잔에 가득 나오기 때문에, 나오자마자 두어모금쯤 일단 들이켜줘야한다. 그리고 데드락 샷을 손가락에 끼워 들고, 맥주잔 벽면에 붙인 상태로 톡 떨구면 완성. 취항에 따라 레몬을 짜넣으면 더 좋고. 아차 사설이 길었군.



평소에 데킬라를 그닥 즐겨먹진 않지만 가끔 못견디게 여기가 오고 싶을 때가 있다. 막 전역하고 tvN 대학토론배틀에 출연하던 시절, 데킬라를 소재로 미션을 수행할 기회가 있었다.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 의사에게 술을 팔아야했는데.. 이래저래 스토리를 잘 짜내서 세일즈에 성공했고 해당 미선에서도 1등을 했더랬다. 지금은 덤덤하게 얘기하지만 당시엔 전역 이후 처음으로 공적인 인정을 받는 상황이라 굉장히 신났거든. 그 스토리텔링도 꽤 멋지게 해냈고. 같이 나갔던 파트너랑 데킬라를 꼭 먹어보자고 얘기가 됐고, 연대생이던 녀석은 , 신촌에 적당히 데킬라를 먹을수 있는데가 있다고 날 데려갔던 것 같다. 아서라.. 이게 어딜 봐서 데킬라겠냐만은. 데킬라긴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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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갓 스물다섯이 됐을 무렵이다.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내 이야기인양 감정이입을 할 수 있던 나이. 서른즈음에는 기운 넘치는 복학생의 기분으로 많이 왔었다. 올 때마다 우리가 정말로 서른즈음이 되면 무얼 하고 있을지 얘기를 하긴 했는데.. 비현실적일만치 멀어보이던 미래여서 불안감조차 희미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좀더 흘러서. 삶을 붙들고 있기가 너무나 버거웠던 수습기자 초반, 여기가 불현듯 생각났다. 쓰러지기 직전의 몸을 끌고 이곳에 와서 한숨만 폭폭 쉬다가 갔더랬다. 슬슬 이 술집의 이름이 제대로 다가오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오랜만에 다시 이 집을 찾았다. 서른이 되고 나서는 처음이었다. 서른 즈음, 마저 지나간 것이다. 정신없이 사는 와중에도 요즘 나이 생각을 종종 한다. 문득 내가 서른이란 인식이 쾅 하고 닥쳐올 때가 있다. 차고 넘치게 젊은 나이란 건 물론 잘 안다. 그런데, 서른이 절대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나의 스무살과 스물다섯살이 같이 떠오른단 말야. 서른이 다가온다고 싵컷 놀렸던 , 이제는 사십대에 접어든 선생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


데드락이나 한잔 딱 들이키고 자면 좋을 것 같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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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어느 날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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