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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PD Mar 02. 2020

인디게임과 카피캣 #3

인디게임 독창성의 진부함


카피캣으로 판정되는 시간 3초


얼마 전 페이스북 '인디라! 인디게임 개발자 모임' 공개 그룹에서 올라온 게임을 두고 인디 개발자들끼리 자그마한 논쟁이 있었다. 사실 올라온 게임에 대한 논쟁보다는 서로 다른 가치관의 충돌과 다른 접근으로 인한 논쟁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논쟁들도 더 많은 생각과 고민들을 하게 만들고 궁극에는 철학적인 접근을 해 볼 수 있다는 면에서 진보적이고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키워드는 '카피캣'이었다. 하지만 카피캣과 독창성을 가지고 마치 선과 악의 대립을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카피캣 : 독창성 = 상업성 : 예술성'이라는 비례식이 너무 쉽게 만들어지는 현실에 좀 다른 접근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쉬운 비례식이 있는데 우리는 무엇을 위해 게임을 만드는 걸까? 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 고민 속에서 모든 현상을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보며 서로를 프레임에 가두고 비난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게임에 대한 비판은 개인의 자유다. 그리고 커뮤니티에서 커뮤니케이션은 개인의 스킬이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혐오의 스펙트럼을 몇 개의 키워드로 재단하여 증오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증오의 대상이 시스템이나 행위가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은 더욱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나도 누군가를 증오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도덕성이나 우월함 그리고 이념의 증명을 위하여 혐오를 소비한 건 아닌지 반성하며 글을 쓴다.




#3 인디게임 독창성의 진부함


여전히 인디게임 개발자들에게 인디게임이란 질문은 계속되고 있다. 각자의 가치관을 투영하여 인디게임을 정의한다. 그중 하나의 기준점이 바로 '독창성'이다. 나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디게임의 '상징성'을 이런 독창성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진부하고 모호한지를 고민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창작이라는 고통과 희열의 영역에서 독창성이라는 멍에를 다른 이에게 짊어지게 만드는 '폐쇄성'이 과연 인디게임 신에 도움이 되는 일인가를 계속 고민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 이런 과정에서 각자의 기준도 다른 '독창성'과 '카피캣'이라는 무게추를 다른 사람의 저울에 올리고 서로를 비난하는 평행선에서는 인디게임은 진화할 수 없음은 자명했다.

독창성(獨創性, originality)은 새롭거나 기발한, 창조 또는 발명 작품의 면모를 가리키며 이는 재생산, 복제품, 위조품2차적 저작물과 구별된다. 원저작물(原著作物, original work)은 다른 사람에서 받은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작품을 기반하거나 그로부터 복제한 것이 아니다. 고유한 스타일과 물질로 만든 작품을 의미한다.

독창성, 즉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라는 용어는 예술가저술가사상가의 찬사로서 적용되곤 한다. 독창성의 현대적 개념은 낭만주의에 묶여 있으며, 이는 낭만적 독창성이라고도 불리는 개념에서 비롯된다.

독창성의 개념은 문화적으로 불확정적이다. 셰익스피어 시기에 존경받는 고전 작품의 유사성을 좋게 평가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으며 셰익스피어는 스스로 "불필요한 발명"을 회피했다. 18세기 들어서 독창성의 개념이 서양 문화에서 이상으로 자리 잡히기 시작했다.

- 출처 : 위키백과 <독창성>



독창성에 대한 찬사


'독창성'은 창작을 요구하는 예술분야부터 산업화 분야를 포함하는 대중문화 전반에 걸친 모든 분야에서 찬사와 존경을 받는다. 독창성은 언제부터 찬사를 받게 되었을까? 독창성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의 어원은 그리스어 ‘포이에시스(Poiesis)’라고 한다. 이는 '만드는 것' 자체를 의미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보는 것'과 '행하는 것'과 함께 자기 목적성을 가진 인간의 윤리적 정치적 행위를 한정하는 의미했다. 즉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창작 행위 자체가 독창성이라는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것이 새로운 것이었다. 자신이 만든걸 똑같이 다시 만든다고 해도 100% 동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조각가 2명이 동일한 인물을 보고 조각한 2개의 조각물을 누가 진짜고 가짜고 이야기할 가치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독창성이 가진 이런 불확정적인 개념은 대부분의 예술분야에서 통용되었다. 기존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범위에서 벗어날 경우 사파로 멸시받을 정도로 고전 작품의 유사성이 고평가를 받던 시절도 있었다.


이런 독창성이 서양에서 찬사를 받게 되고 오리지널리티라는 개념이 통용된 건 15세기부터이다. 이런 통념을 만들 수 있었던 가장 큰 계기는 바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일 것이다.

본래 르네상스 이전 시대의 인류에게 복제라는 개념은 진정으로 통용되지 않았다. 무언가를 복사하더라도 이는 모방에 가까웠지 복제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오랜 시간과 상당한 노력이 필요해서 전문적으로 양성된 이들이 아니고서야 복제를 시도하는 일조차 버거웠다. 하지만 1450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으로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출처] 오리지널리티에 대하여|작성자 ㄱ장준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을 통한 복제라는 개념은 오리지널을 소유자 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결국 오리지널을 소유한 사람들이 법적인 보장을 받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특허권'이다. 1474년 특허권 제정에 이어 1517년 베네치아에서 최초의 저작권법이 제정된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상업적인 관계에서 '대량 복제'는 오리지널리티를 더욱 강력하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이러한 독점적 지위를 인정받고 재산권으로 보호받는 결정적인 시기는 바로 '산업혁명'시기라고 생각한다. 산업혁명으로 엄청난 공산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고 복제품과 원본을 구별하는 오리지널리티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된 시기였다. 그리고 예술가들이 자신의 오리지널리티의 한계를 마주하게 된 '복제 혁명'이 바로 사진의 발명이었다. 사진기의 발명은 당시 초상화를 그리던 예술가들에게는 생존을 위협받는 무서운 일이었다. 그렇게 예술가들은 자연물의 복제라는 기존 틀에서 벗어나 예술만이 가질 수 있는 오리지널리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예술가들은 복제품에는 없는 다른 정체성을 찾아야만 했다. 당시 지성인들은 다양한 오리지널리티 전략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아낸 정체성 중 하나가 바로 '진정성(Authenticity)'이다. 이렇게 진정성이란 개념은 미술가들이 복제와 싸우는 사이 현대의 철학과 심리학, 사회학, 문학, 정치에 이르러 폭넓게 쓰이는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예술과 모방


18세기 이전의 예술가들은 이전 시대의 예술가들을 모방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를테면 문학계의 거장인 셰익스피어(1564~1616) 또한 '불필요한 발명'을 피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많은 예술가들은 그들이 존경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작했다. 예술가들의 모작은 아직 내가 갖지 못한 '오리지널을 소유한 예술가에 대한 일종의 존경이었고 찬사'였다. 이러한 일화는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흠모하고 존경한 밀레와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6 - 진짜 가짜

고흐는 엄청나게 많은 작품들을 모사했고 특히 밀레의 그림은 고흐 자신이 오리지널리티를 찾은 시점에도 계속되었다.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이 대가의 작품을 배우기 위해 초기에 열중하는 것이 모사이며, 비로소 원숙기에  존경을 담아 모사가 아닌 자신의 재해석을 통한 '오마주'를 택하게 된다. 즉 오마주는 자신의 오리지널리티를 발현하는 시점에 '오리지널리티를 찾게 해 준 스승에 대한 존경을 담는 고마움의 표현'이었고, 새끼 고양이가 어미 고양이에게 물려받은 '클리셰를 벗어났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이렇게 위대한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존경했던 대가들의 작품을 모작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갔다. 하지만 누구도 빈센트 반 고흐를 모작만 하던 화가로 기억하지도 않고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자신의 오리지널리티를 찾기 위한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고흐는 밀레의 그림을 따라 그리며 자신의 상처 받은 영혼을 치유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독창성이 가진 이런 불확정적인 개념을 철학가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 게 특징이다. 그리고 복제품들의 홍수 속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전략을 고민해야 했고, 이런 오리지널리티의 찬사는 자연스럽게 18세기 지성인들의 미학론에 편입되고 시작하고 다양한 전략에 대한 담론들이 오갔다. 칸트의 '천재와 예술', 헤겔의 '예술 생산의 객관 원리', 후마누스의 '휴머니티를 노출하는 진정성' 등이 대표적인 오리지널리티 전략이었다. 대부분 '천재성'이라는 모호함으로 설명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결국 기계와 인간이라는 구분을 통한 가장 유효한 전략이 '진정성(Authenticity)'이었다. 그리고 18세기에 들어서 독창성의 개념이 서양문화에서 이상으로 자리 잡히기 시작했다. 결국 현실이 아닌 이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 '독창성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독창성의 진부함


영어에 '진부함'을 의미하는 메디오크러티(mediocrity)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중간'을 의미하는 메디(medi)와 '험한 산'을 의미하는 오크리스(ocris)의 합성어다. 산 정상을 오르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중간쯤에서 지쳐, 중간에서 머뭇거리는 상태가 '진부함'이다.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오리지널리티라는 말뿐만 아니라 "창조한다"라는 말도 없었다고 한다. 그냥 "만든다"라는 말로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모방론에서 화가는 그저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이를 모방함으로써 그 역할을 마친다고 보았다. 멋진 작품들을 만들어낸 당시 예술가들은 대부분 그저 먹고살기 위한 노동가들이었다. 그리고 중세에는 '창조'란 신의 영역이었고 예술가는 단지 신의 창조 행위를 대신 전달하거나 모방하는 역할 정도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독창성'의 전반적인 인식은 과거의 전통을 기초로 하여 조금 새로운 것을 말했다.


그리고 산업화와 복제 혁명으로 대량 복제가 가능해진 시대가 도래했고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매일 똑같은 복제품을 만드는 공장 안의 기계들에게 예술가들은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이렇게 태동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와 달리 기계적 모방을 혐오하기 시작했고 예술을 단순 모방이 아닌 '독창성'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런 흐름은 철학자들에 의해 포장되었다. 그들은 독창성을 '자유롭고 즉흥적이면서 자연스럽고 독특한 행위'라고 칭하며 '천재'라는 신화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천재는 더 이상 모방하지 않으며, 평범한 사람은 천재를 모방할 수 없다고 정의했다. 이 말은 극단적으로 "천재가 아니면 독창성을 가질 수 없다"라는 오만이다.


천재가 아니면 독창성을 가질 수 없다.


현대 모더니즘도 언제나 독창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또한 낭만주의의 고전주의 탈피의 연장선일 뿐이다. 모더니즘이 가지는 정체성 중 낭만주의보다 강력한 정체성은 바로 '혁신'이다.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고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성 있는 방식의 창조를 강조하는 것이다. '혁신'이란 단어가 또 열심히 활용되는 분야가 있다. 바로 산업분야이다. 결국 우리가 항상 반대편에 두었던 예술성과 상업성은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된다.


우리는 이 부분을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왜 독창성을 강요했는지, 우리에게 '천재성'은 과연 창조를 위한 동력이 되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독창성'을 시장에 팔아야만 한다. 독창성은 그 자체로 상품이 되는 것이고, 순수한 독창성이란 결국 신화인 것이다. 성공한 예술가의 천재성을 칭송하지만 결국 '혁신적 모방자'일 뿐이다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독창성을 표현하는 단어들은 혁신, 진정성, 천재성, 최초의 시도 등이다. 이러한 찬사들이 자리 잡은 건 사실 예술의 역사에 비하면 얼마 되지도 않은 개념이다. 그리고 패션디자인처럼 여전히 적용되지 않는 영역도 존재한다.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봐야 할 차례다.


당신이 추구하는 '독창성'은 예술성인가?, 상업성인가?
다른 이를 '카피캣'이라 비난하는 근원은 예술성인가?, 상업성인가?


우리가 말하는 인디라는 이념은 과연 무엇으로부터 독립한 걸까? 자신도 한발 나아가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창조물을 간섭하는 것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인디가 맞는 걸까? 우리 세대가 행하는 오리지널리티의 본질도 그 발생의 시점과 크게 변하지 않은 주체적 자기 정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 내가 처음 만들었던 게임을 되돌아보며 오늘 나의 자화상을 그려본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7 - 되돌아보는 시간 - 자화상


#4에서는 '인디게임의 패러독스'라는 주제로 인디게임과 카피캣 비난, 그리고 저작권 침해의 패러독스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모델을 쓸 수 없어, 대신 내 얼굴을 그리려고 좀 좋은 거울을 샀다.
나를 잘 그리면 다른 사람도 잘 그릴 수 있겠지?”

모델을 쓰려면 돈이 듭니다, 그렇다고 자꾸 그려 보지 않으면 감각을 읽어 버립니다.
그래서 반 고흐는 자화상을 그립니다. 캔버스를 없으면 그린 위에 또 그립니다.
그렇게 그는 수 없이 되돌아봅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1888년 9월 동생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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