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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PD Mar 15. 2020

인디게임과 카피캣 #4

인디게임의 패러독스

카피캣으로 판정되는 시간 3초


얼마 전 페이스북 '인디라! 인디게임 개발자 모임' 공개 그룹에서 올라온 게임을 두고 인디 개발자들끼리 자그마한 논쟁이 있었다. 사실 올라온 게임에 대한 논쟁보다는 서로 다른 가치관의 충돌과 다른 접근으로 인한 논쟁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논쟁들도 더 많은 생각과 고민들을 하게 만들고 궁극에는 철학적인 접근을 해 볼 수 있다는 면에서 진보적이고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키워드는 '카피캣'이었다. 하지만 카피캣과 독창성을 가지고 마치 선과 악의 대립을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카피캣 : 독창성 = 상업성 : 예술성'이라는 비례식이 너무 쉽게 만들어지는 현실에 좀 다른 접근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쉬운 비례식이 있는데 우리는 무엇을 위해 게임을 만드는 걸까? 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 고민 속에서 모든 현상을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보며 서로를 프레임에 가두고 비난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게임에 대한 비판은 개인의 자유다. 그리고 커뮤니티에서 커뮤니케이션은 개인의 스킬이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혐오의 스펙트럼을 몇 개의 키워드로 재단하여 증오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증오의 대상이 시스템이나 행위가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은 더욱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나도 누군가를 증오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도덕성이나 우월함 그리고 이념의 증명을 위하여 혐오를 소비한 건 아닌지 반성하며 글을 쓴다.




#4 인디게임의 패러독스


과연 인디라는 이념은 많은 인디 개발자들이 생각하는 이상주의일까? 나는 완전히 반대편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현실주의자들이 인디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지금처럼 인디가 하나의 장르처럼 불리기 전, 인디 개발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재미와 가치관을 담는 게임을 만들지 못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직장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누구의 도움 없이 오로지 혼자 일어설 수 있는 미래를 위해 한발 한발 나가간 현실주의자들이다. 이상주의자들의 오만함은 언제나 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뒤틀린 세상을 다시 원상복귀시키고 움직인 사람들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들이었다.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이념, 서로 다른 기준의 도덕성 그리고 실리 없는 명분에 매몰된 이상주의자들의 손가락질을 견디며 누군가는 묵묵히 돛을 조정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견디며 단단해진 현실주의자들이 인디게임 개발자들이었다.


비관론자는 바람을 불평하고,
낙관론자는 바람이 변하기를 기대하지만,
현실주의자는 돛을 조정한다.

- 미국의 작가 윌리엄 아서 워드 -



귀납적 게임 디자인의 부정


많은 게임 개발사들이 게임 디자인에 있어서 '시장조사라는 명목 하에 귀납적 접근'을 통해 게임을 만든다. 즉 게임을 만드는 사람의 주관적인 영역이 아닌 객관적인 영역에서 게임 디자인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아무리 객관화한다고 해서 게임 디자이너의 주관적인 가치관이 정말 배제되지 않는다. 이런 혼돈의 영역에서 게임은 디자인된다. 그리고 같이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이런 혼돈의 영역은 날마다 늘어난다. 이렇게 이 영역은 한 개인의 창의적 영역이 아닌 '데드라인과 해소되지 않는 창작의 욕망'이 뒤엉킨 통곡의 영역이 되어간다. 왜 우리는 이런 고통 속에서 게임을 개발하는 것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회사에서 돈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급여를 받고 게임을 만든다. 그래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하여 귀납적 게임 디자인을 통해 대중이 원하는 게임을 만들고, 완성하여 수익을 발생시켜야만 한다. 대부분의 게임 개발자들은 이렇게 원치 않는 고통을 감수하고 게임을 만든다. 하지만 인디게임 개발자들은 이러한 귀납적 게임 디자인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일어선다. 즉 게임을 만드는 과정에서 원치 않는 고통을 줄이고 대중적 성공에 대한 위험부담을 수반하더라도 '만드는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현실주의자들이다. 하지만 이 현실주의자들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고, 누군가는 절름발이이고, 누군가는 가난하다. 그래서 그들이 다른 이유는 '불완전하지만 욕망을 직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욕망을 직시하는 절름발이 현실주의자들


수많은 인디게임의 정의 중에서 모든 인디게임 개발자들이 동의하는 한 가지 정의는 '내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든다'일 것이다. 이런 현실주의자들의 '강한 자기 확신'이 스스로를 밀어붙이고 그렇게 가속하면 창의성은 로켓이 된다.


내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든다.


이런 면에서 인디게임 개발자들은 '욕망을 직시하는 절름발이 현실주의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불완전성을 극복하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온전히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나는 이러한 불완전성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독보적인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인디게임 개발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디게임을 사랑하는 플레이어들은 이러한 인디게임의 드라마에 감동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찬사를 인디게임의 '독창성에 대한 찬사'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착각은 "천재가 아니면 독창성을 가질 수 없다"라는 낭만주의의 오만을 반복하는 일이다.

독창성을 '자유롭고 즉흥적이면서 자연스럽고 독특한 행위'라고 칭하며 '천재'라는 신화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천재는 더 이상 모방하지 않으며, 평범한 사람은 천재를 모방할 수 없다고 정의했다. 이 말은 극단적으로 "천재가 아니면 독창성을 가질 수 없다"라는 오만이다.

나는 독창성을 천재라는 완전체가 아니라 불완전체가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현된다고 본다. 즉 다른 사람들은 그 가치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영역에서 '나라는 블랙스완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 결과라고 본다. 


좀 더 설명을 해보자면 날지도 못하고 간신히 수면 위로 머리만 들어 올리고 숨을 쉴 수 있을 정도로 헤엄을 치는 블랙스완이 있다. 블랙스완은 다른 백조와 다른 모습과 콤플렉스로 인하여 숨어 지내게 된다. 하지만 어느 날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비행의 욕망을 만든다. 이런 욕망은 피나는 연습을 통해 수면 위로 몸을 온전히 드러낼 정도로 다리의 힘을 길러내고 더 나아가 일반 백조들과 조금은 다른 독특한 비행을 터득하게 된다. 결국 이렇게 불완전하지만 감동적인 비상을 많은 백조들은 신기한 듯 바라본다.


결국 나는 원래부터 블랙스완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처음 보는 익숙하지 않은 무엇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날아오른 블랙스완은 귀납적 게임 디자인 방법론에 크게 한방 먹인다. 귀납의 오류는 이렇게 깨지는 것이다. '모든 백조가 하얀색은 아니야!'라고 외치고 증명하는 사람들이 바로 인디게임 개발자들이다.


모든 백조가 하얀색은 아니야!


이렇게 발견된 블랙스완이라는 비주류는 주류를 추종하는 백조들의 찬사를 받으며 주류의 고정관념을 바꿔나간다. 인디게임은 이런 역설을 통해 자신을 드라마틱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즉 독창성은 온전한 자신이지 억지로 차별을 만들어내며 자신을 검은색으로 칠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갖기를 강요하고 가지지 못했다고 비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창성은 순간 만들어지는 아이디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독창성이 그런 비난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강제로 만들어질 수 있다면 과연 그것은 독창성이 될 수 있을까? 다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는 시간이다.


#5에서는 '인디게임과 그레이존'이라는 주제로 과거 그리고 현재 인디게임 독창성의 굴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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