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게임과 그레이존
카피캣으로 판정되는 시간 3초
얼마 전 페이스북 '인디라! 인디게임 개발자 모임' 공개 그룹에서 올라온 게임을 두고 인디 개발자들끼리 자그마한 논쟁이 있었다. 사실 올라온 게임에 대한 논쟁보다는 서로 다른 가치관의 충돌과 다른 접근으로 인한 논쟁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논쟁들도 더 많은 생각과 고민들을 하게 만들고 궁극에는 철학적인 접근을 해 볼 수 있다는 면에서 진보적이고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키워드는 '카피캣'이었다. 하지만 카피캣과 독창성을 가지고 마치 선과 악의 대립을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카피캣 : 독창성 = 상업성 : 예술성'이라는 비례식이 너무 쉽게 만들어지는 현실에 좀 다른 접근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쉬운 비례식이 있는데 우리는 무엇을 위해 게임을 만드는 걸까? 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 고민 속에서 모든 현상을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보며 서로를 프레임에 가두고 비난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게임에 대한 비판은 개인의 자유다. 그리고 커뮤니티에서 커뮤니케이션은 개인의 스킬이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혐오의 스펙트럼을 몇 개의 키워드로 재단하여 증오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증오의 대상이 시스템이나 행위가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은 더욱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나도 누군가를 증오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도덕성이나 우월함 그리고 이념의 증명을 위하여 혐오를 소비한 건 아닌지 반성하며 글을 쓴다.
30억 년 전쯤 지구에서 최초의 생명이 출현하고 지구 생명의 연대기에는 엄청난 규모의 대멸종이 5차례 정도 있었다. 이런 대멸종을 진화론에서는 '대량절멸(大量絶滅,mass extinction)'이라고 한다. 보통 한 생물권의 생물 중 70% 이상이 멸종하는 이 엄청나고 무서운 사건이 5차례나 있었지만 지구 생명의 연대기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생명은 그만큼 강인하고 경이롭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유명한 대량절멸은 5대 멸종 중 마지막인 공룡의 멸종일 것이다. 이런 대량절멸은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인류에게도 많은 교훈을 준다. 결국 지구는 지배할 수 없으며 잠시 빌리는 것이다. 언젠가 인류가 맞이할 아포칼립스는 대량절멸이라는 단원에 비하면 그저 지구 연대기의 짧은 한 문장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대량절멸은 당시 대부분의 번성했던 생명체들에게는 참 슬픈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된다. 현생 조류의 조상인 공룡이 사라진 5차 대멸종은 당시 주류 생명이었던 공룡들에게는 재앙이었지만 인류의 기원인 포유류에게는 엄청난 기회가 되었다. 즉 이런 대멸종은 진화의 팽창을 억압받던 종의 DNA에게는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폭발적인 진화의 기회'가 된다. 그리고 당시 포유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작은 몸집이었다. 운석의 충돌로 지구는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거대한 몸집의 주류 공룡들은 척박해진 지구의 환경에서 버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작은 몸집의 포유류는 작은 벌레와 척박한 땅에 자라기 시작하는 낮은 풀들을 먹으며 생존했다. 거대한 몸집은 주류들의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서는 유리하지만 이런 '대멸종의 모멘텀에서는 악조건'이 된다.
나는 인디게임의 생존과 부흥은 이런 대량절멸의 메커니즘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인디게임 씬에서 많이 회자되는 '인디포칼립스(Indiepocalypse)'를 부정하는 반증이 바로 이 메커니즘이다. 새로운 플랫폼, 장르, 게임 디자인, 규칙이 나타나면 기존 주류들은 적응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자리를 인디게임이 선점을 할 수 있다. 결국 이런 주류들의 대량절멸의 위기에서 인디게임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전적 강점은 '진화의 궁극적 가치인 다양성'이다. 그리고 이런 대량절멸이 만든 '모멘텀의 파도'에 올라탈 기회는 주류를 따라가면 절대 오지 않는다. 주류를 따르는 순간 스스로 대량절멸의 범위에 들어가는 종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회색지대나 그레이존은 흑백의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립지역이나 제3 지대를 말한다. 생각나는 대로 그레이존의 키워드를 나열하자면 이도 저도 아닌 상태, 애매한 범위, 흑과 백 그리고 선과 악이 없는 지대. 이분법적 논리가 통하지 않는 곳. 모호함의 구역,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 해적의 구역, 정립되지 않은 혼돈, 제3세계, 제3세력 등 많은 키워드들이 있다. 즉 주류들의 경합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균형의 지역이며 서로 누구도 간섭하지 않으며 받지 않을 다양성이 존재하는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다양성을 통해 대량절멸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생존의 영역이 바로 그레이존'이다. 대량절멸을 맞이하는 주류의 맹점은 바로 자기 복제를 통한 '다양성의 상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그레이존이 가지고 있는 성질 중에 결국 하나만 남게 된다면 'No Rules'라고 할 수 있다.
No Rules
그리고 이런 'No Rules' 즉 '주류가 만든 규칙의 파괴'라는 리스크를 가지고 만들어지는 게임이 인디게임이다. 주류의 규칙을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그것을 독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No Rules'이라는 리스크를 저니를 만든 제노바 첸은 해적선에 비유했다. 너무나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이런 수많은 해적선들은 그레이존에서 위험하지만 희망을 품은 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다른 사람 게임을 따라 하는 것이 인디일까? 그렇지 않다. 그건 그냥 연습이다. 유니크하고, 진정 독립되어있고, 리스크를 지고 가는 게 인디"라고 정의했다. 그는 "인디는 해적선 같아야 한다"라고 비유했다. 바다에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누구의 명령을 따르는 것도, 약속된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를 감내하고서라도 보물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는 것이다.
- 제노바 첸 단독 인터뷰 중 -
처음 우리나라에서 비디오 게임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부분 아마추어 게임 개발이 대부분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당시 비디오 게임은 아무나 게임을 만들어 팔 수 있는 시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락실이 아니면 이런 비디오 게임을 쉽게 접할 수 환경도 아니었다. 집에 콘솔 게임기나 PC를 가진 집들은 어느 정도 생활이 넉넉한 부잣집들이었다. 그리고 비디오 게임은 애들이나 즐기는 비주류 문화라는 게 대중의 인식이었다. 대중의 관심에서 멀었기 때문에 상업적인 관심도 당시에는 다른 주류 문화들에 비해 낮았다. 1980년대 말 1990년 초반까지 한국의 게임 개발은 아마추어 공모전등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아마추어 개발자들의 이념적인 연장선이 인디게임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대중의 인식에서 인디게임은 아마추어 게임이라는 등식을 만들게 된 게 아닐까 추측한다. 하지만 인디게임은 아마추어 게임이 아니다. 아마추어 게임이 인디라는 그레이존에 포함되지만 등식을 성립할 수는 없다.
1990년대 말 PC방의 열풍과 IMF, 스타크래프트, 리니지를 거치며 게임산업은 IT산업의 메인스트림이 되었다. 이렇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그레이존은 자본과 주류들의 영향을 받으며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이번 '인디게임과 카피캣'이라는 주제를 관통하는 '독창성의 멍에'가 이런 '주류의 간섭에 의해 생성된 의식'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많은 인디 개발자들이 주창하는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은 포커싱부터 헛다리인 경우가 대다수다. 대부분 자본을 투자나 돈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가장 일반적인 딜레마가 '인디게임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일하는 개발자는 인디 개발자인가?'란 질문이다. 많은 인디 개발자들이 이 질문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설전들이 오고 갈 것이다. 그럼 월급을 받지 않고 일하는 게 인디의 이념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지본으로부터의 독립'이 말하는 것은 주류가 점령한 '시장이 가진 힘의 논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즉 자본은 '시장의 힘'이며 주류가 만든 '상업적 가치만을 위한 룰(Rules)'에서 벗어나 궁극의 재미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럼 현재 주류가 만든 힘과 규칙(Rules)은 무엇일까? 우선 현재 인디게임이 저항해야 되는 힘과 규칙(Rules)을 대표하는 키워드 몇 개를 나열해 본다.
1. 장르 / 광고 수익화 / 방치형
2. 모바일 게임 IAP / P2W / 랜덤박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장르(genre)라는 단어가 있다. 과연 장르라는 게 나오게 된 이유는 뭘까? 르네상스 시대 이전에는 유사성이 고평가를 받던 시절이었다.
독창성이 가진 이런 불확정적인 개념은 대부분의 예술분야에서 통용되었다. 기존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범위에서 벗어날 경우 사파로 멸시받을 정도로 고전 작품의 유사성이 고평가를 받던 시절도 있었다.
당시에는 내 작품을 재미있게 즐겨주는 소비자의 접근성을 위한 최소한의 분류였고 키워드였다. 사실 다양성이 멸시받던 시장에서는 당연한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즉 소바자에게 가장 안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던 마케팅의 개념으로 시작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소비자는 '주관적인 흥미의 유사성'에 소비한다. 결코 독창성을 보고 소비하지 않는다. 즉 내가 경험한 재미를 중심으로 소비의 범위가 넓혀지는 것이다. 결국 장르는 이런 '상업적 편승'을 기반한다. 이것이 장르가 가진 개념이 인디게임과 어울릴 수 없는 딜레마다. 가끔 인디 개발자들 간에 이런 담론이 오간다.
장르가 된 게임을 베끼는 건 인정된다?
나는 이 담론이 일부 인디 개발자들의 인지부조화를 잘 설명하고 있다고 본다. 과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뭘까? 주류가 된 게임을 카파캣하는것은 용인되고 아직 주류가 안된 게임을 카피캣하면 비난받는다. 많은 개발자들이 카피캣한 게임은 장르에 속하고 면죄부를 받는다? 나는 오늘날 인디게임의 가장 큰 '상업적 편승'이 바로 장르라고 생각한다. 한동안 인디게임이란 장르로 구분되던 시기도 있었을 정도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그리고 방치형이라는 장르가 이런 편승의 선두에 만들어진 독사과라고 생각된다. 자신이 만드는 게임을 장르라는 기존 틀에 넣지 말고 좀 더 많은 다양성을 추구해야 된다고 본다. 최근 스팀이나 넷플릭스의 경우도 이런 장르라는 오래된 분류를 벗어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콘텐츠 유통망에서 장르는 구시대의 유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 정체성을 가진 몇 개의 키워드가 오리지널리티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장르라는 모양 틀을 벗어나 소재와 규칙의 다양성이 만드는 재미의 향연을 즐기게 될 것이다.
게임 플레이의 본질, 재미가 목적이 되어야 하며
재미를 위한 모방은 인정받아야 된다.
나는 과도한 독창성의 강박은 인디게임 씬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좀 더 다양한 게임들을 베껴서 다양성을 확보하는 게 진화를 위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즉 다른 사람들의 간섭에서 독립하여 본인이 인정하는 재미를 모방하는 것이 한걸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디게임을 독창성으로 서로를 옭아맨다면 결국 현존하는 모든 비디오 게임은 1962년 최초 디지털 방식의 컴퓨터 게임 '스페이스 워' 이후로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인디게임이 혁신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나야 한다. 그런 강박으로 인하여 재미를 잃어버린다면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그리고 이제 인디게임은 장르라는 '상업적 편승' 그리고 '주류의 규칙'을 과감하게 버릴 필요가 있다.
이전에 쓴 글(구글플레이는 진화가 필요하다 / 한국 게임 퍼블리싱 사업의 종말)에서도 현재 모바일 게임 오픈마켓의 F2P, IAP, 랜덤박스 등 주류 BM들의 한계와 위험성에 대하여 자주 언급을 했었다. 그리고 인디게임도 마찬가지로 지금의 모바일 환경 중심의 광고 수익화에 높은 의존도를 벗어나기 위한 시도들을 계속해야만 된다.
현재와 같은 IAP중심의 P2W 모델이 지배하는 모바일 게임이 아닌 페이 투 플레이(Pay-to-play) BM기반의 PC, 콘솔 시장의 진출이 절실한 이유다. 그리고 최근 네오위즈의 행보를 보면 한국 퍼블리싱 사업이 극적 생존의 희망을 아직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만약 지금과 같은 높은 의존도가 계속된다면 대량절멸의 위기에서 주류와 함께 생존의 기회는 박탈되고 만다.
나는 '재미의 다양성을 배양'하는 것이 인디게임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다양성의 필요조건은 독창성도 아니며 질적 향상도 혁신도 아니다. 오직 순수한 재미를 위해 서로의 DNA를 나눠주고 복제하고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재미의 다양성을 배양하는 것이 인디게임의 숙명
그리고 이런 서로의 능동적인 상호작용이 더 많은 공진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다양성의 원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다양성이야말로 콘텐츠 생태계의 균형을 이루는 공존 법칙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된다. 그리고 우리가 주류의 무엇을 저항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나아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다양성이 인정받는 그레이존의 순기능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순수한 궁극의 재미를 위한 노룰존, 주류의 규칙에 억압되지 않는 넓은 바다, 아무도 가보지 못했던 보물섬을 향한 우리의 항해가 영원하기를 바란다.
#6에서는 '표절과 저작권 침해'라는 주제로 '베끼다'라는 개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