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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Aug 28. 2020

일본 천황에게 침을 뱉은 남자

<산산조각 난 신> 와타나베 기요시

천황제 파시즘의 일본


천황 폐하로 말할 것 같으면 '신성불가침' 일천만승의 대군이자 '인간의 모습을 한 신'으로서 이 나라의 '원수'가 아닌가 (산산조각 난 신, 글항아리, P.19)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 도대체 어디에 의지해서 무엇을 믿고 살아가야 할까. 알 수가 없다. 나도 나를 알 수가 없다. 아는 거라곤 그저 내가 이미 군복을 벗고 군인이기를 그만두었다는 것뿐이다. (산산조각 난 신, 글항아리, P.36)


천황 생각이 종일 머리에 박혀 떠나질 않는다. 맥아더와 나란히 찍은 신문의 사진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울렁가리고, 머리로 피가 확 솟는다. 명치 언저리가 불이 난 것처럼 뜨겁다. 내가 배신당했다는 분노에 휘말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스스로가 두려웠다. 내가 이제껏 천황에게 품었던 한없는 신앙과 경애의 마음은, 그 사진 한 장으로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나는 천황한테 속았다. 절대자로 믿었던 천황한테 배신당했다. (산산조각 난 신, 글항아리, P.66)


<산산조각 난 신>은 2차 세계대전 일본군으로 참여한 와타나베 기요시의 수기다. 청소년의 나이에 일본군에 입대해 일본이 패망한 이후 퇴역 군인이 된 필자의 경험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1945년 이전의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 사전 지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위로부터의 근대화다. 메이지 유신은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었다. 서양의 근대화는 각자의 개인이 중심이 되어 근대국가를 건설했다면, 일본은 천황이 중심이 되는 근대화 과정을 이루었다. 서양과 다르게 일본이 천황과 근대화라는 대립적 개념을 병행한 것은 '일본 국민'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지방분권제로 번이라는 영주들 아래 일본인들이 지배를 받고 있었다. 즉, 각자의 아이덴티티가 강한 상태에서 일본인들을 국민으로 묶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메이지 정부는 국민들을 신민으로 지칭하면서 국민을 결집하는 구심점으로 천황을 선택한 것이다. 1910년대 일본은 자유주의 및 진보주의가 발달하며 사회가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1920년대 관동대 지진으로 인해 일본 경제는 처참하게 무너지기 시작하며, 1929년 세계 대공황 이후 일본의 화두는 질서의 회복이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보수극우파인 군부사 세력을 천황제 파시즘(군국주의 파시즘)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 일본 군부는 초민족주의를 내세우는데 '천황에 대한 절대복종'을 국민들에게 주창한다. 특히, [대일본제국헌법]에는 천황을 인간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로 명명한다. 그리하여, 엘리트, 지식인, 학교 교사 등은 자발적으로 천황과 펀황제 파시즘을 찬양한다. 이 책의 저자 와타나베 기요시는 이러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으며, 천황을 인간이 아니라 신으로 믿었다. 일본 군인들에게 일본의 패전은 곧 본인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정체성을 부여하던 것은 일본제국과 천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제국이 패배 선언을 하며, 천황이 신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일본의 군인들은 정체성을 잃으며 모두 페닉에 빠지게 된다.


일본제국의 신민에서 한 사람의 개인이 된 기요시


하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오로지 천황을 비난하는 것만으로 다 정리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청황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믿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모르고 그랬다면 몰랐던 것에 대해, 또 속아서 그랬다면 속았던 것에 대해, 결국 스스로의 무지에 대해 책임질 사람은 나 자신이 아닌가. 모든 것을 고스란히 천황 탓이나 세상 탓으로 돌려버리면 마음은 편할지 몰라도, 나 자신의 실체는 허공에 붕 떠버린다. 더는 내가 나라고 할 수 없다. 아무리 과거가 지긋지지긋하다고 해도 그것을 지워버리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무엇보다 스스로의 허물을 모른척해서는 안 된다. 나는 내 안으로 더욱 성큼성큼 들어가야 한다. 당면한 문제는 천황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산산조각 난 신, 글항아리, P.284)


어쨌거나 일본인은 금방 잊어버린다. 잊으면 안 되는 것까지 깨끗이 잊어버린다. 전쟁 중에 미국에 대해 품었던 그 뜨거운 증오도, 적새심도, 전쟁에 진 순간 구름처럼 사라졌다. (중략) 어쨌거나 과거를 깨끗이 잊어버리고 지금처럼 이득에 눈이 먼 지도자한테 휘둘렸다가는 머잖아 또다시 미국한테 호되게 당할 것이다. (산산조각 난 신, 글항아리, P.286-287)


내가 천황을 숭배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부터였다. 나는 학교에서 매일같이 천황의 '고마움'을 거듭 배웠다. (중략) 나는 배운 것을 곧이곧대로 머릿속에서 받아들였고, 또 그것을 모조리 나 스스로 생각해냈다고 믿어버렸다. (중략) 그러므로 천황에게 배신당한 것은 사실 천황을 그런 존재로 믿었던 나 자신에게 따질 일이다. 나는 현실의 천황이 아니라 내가 멋대로 내 안에 품었던 허상의 천황에게 배신당했다. 말하자면, 내가 나를 배신했던 것이다. 나 스스로 자신을 속였던 것이다. (산산조각 난 신, 글항아리, P.293)


일본이 패배 선언을 하고 오타나베 기요시는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살아간다. 그의 수기를 읽어보면 전쟁의 책임자인 천황, 군부, 엘리트들이 전쟁의 책임을 지지않고 자신들이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대해 끝없는 분노를 표현한다. 천황과 일본제국은 퇴역 군인들과 국민들에게 전혀 사과를 하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의 문제를 국민에게 떠넘기는 행동에서 기요시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그러던 중, 기요시는 이쿠오를 만나게 된다. 이쿠오는 기요시에게 천황에 대한 분노는 이해하지만 천황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은 기요시의 행동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당시 기요시는 이쿠오의 질문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만 계속 이쿠오의 충고를 생각하며 자신의 내면에 대해 고민한다. 기요시는 일본제국과 천황의 프레임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그를 순종적으로 믿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이 과정이 이 책의 묘미인데, 기요시는 그동안 일본제국과 천황이 주었던 정체성에서 벗어나, 생각하고 고민하며 비판하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기요시는 일본사회에 자성의 목소리를 높인다. 기요시는 일본 국민들이 자신들의 과오를 망각하고, 고민하지 않으며 세상의 순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안일한 태도를 비판한다. 마지막 수기에서 기요시는 자신이 일본제국에게 받은 봉급과 물품비를 모두 계산해서 천황에게 보내는 장면으로 끝이난다. 그러면서 '나는 이로써 당신에게 빚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마무리가 된다. 기요시는 일본제국의 침략전쟁, 엘리트들의 이중적 태도 그리고 정체성 없이 천황에게 복종하며 생각이 없는 일본 국민들을 비판한다. 사실, 이런 자성의 모습을 볼 때, <산산조각 난 신>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산산조각 난 신>의 와타나베 기요시의 성찰은 날카롭다. 현대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천황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천황에 대해 분노하는 일본인들도 많았지만 여전히 다수의 일본인들은 천황을 마음 속으로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다수가 천황을 지지하는 현상은 곧 위기 상황에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일본인들이 천황을 구심점으로 신민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일본만의 사안은 아닐 것이다. 한국은 현재 수많은 천황들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다. 대한민국은 정치인, 종교 지도자, 연예인, 유튜버, 지식인 등을 자신의 아이콘으로 여기며, 숭배를 하고 있다. 누군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비판하면 벌 떼 같이 모여들어 공격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 대한민국이 1930년대 일본제국의 신민들과 다른 것은 무엇인가. '나'와 내가 좋아하는 유명인을 동일시해 그들을 공격하는 것을 마치 자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착각해 갈등하는 모습을 볼 때 한숨이 나온다. 도대체, 국민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것이 정치인인데, 요즘은 국민들이 앞다투어 정치인의 이익을 대면하는 모습은 참 진기한 모습이다. 대한민국의 대다수 국민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할 때, 유명인을 자신의 숭배자로 삼으며, 그들이 하는 말에 대해 아무 의심도 가지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과연 시민인가? 언제나 자신들이 깨있는 시민을 저처하며 오로지 꿈속의 세계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가? 시민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홀로 이성과 도덕성을 가지고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다. 시민은 오로지 내가 숭배하는 대상의 말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믿음을 가지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미 대한민국은 대단한 경제적 발전을 했고 훌륭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한 번 자신을 돌아보고 자성의 시간을 가질 때가 아닌가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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