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과 서재
전자책에 담긴 활자 뭉치가 종이책을 쉬이 대체해줄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왠지 전자책은 내용을 담는 매체로만 느껴졌다. 반면, 종이책은 단지 어떤 내용을 담는 사물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책은 그 자체로 자신을 표현하는 정직한 사물 같았다. 마치 산과 나무와 들꽃이 다른 무엇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닌 것처럼, 종이책은 그 자체에 향기와 표정과 풍경이 담긴 사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해 놓고 다시 변덕을 부렸다. 종이책이 없으면 나는 전자책이 아니라 유튜브를 더 많이 볼 터였고 간혹 성우나 AI가 읽어주는 오디오북 정도나 들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읽고’ 싶지 않은 순간이 빠르게 올 것 같았다. 단말기에 책을 넣으면 종이책의 물성이 사라짐과 동시에 간직해둔 사연도 사라지고 정보만 남겨질 것처럼 느껴졌다. 스스로 내린 결단 앞에서, 그리고 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채 서로 기대어 있는 종이책들 앞에서 나는 주저하고 있었다. 책에 대한 집착일까 욕심일까. 아니면 어떤 결핍일까.
피에테르 얀센 엘링가는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화가다. 당시의 많은 네덜란드 화가처럼 그는 주거공간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주로 그렸다. 이 그림에선 독특하게 책을 읽고 있는 하녀의 모습을 묘사했다. 높은 창문으로부터 쏟아지는 빛 아래 가정부로 보이는 여인이 고요한 공간에서 책을 읽고 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싶다는 듯, 방 모서리를 향해 뒤돌아 앉은 그녀는 책이 건네는 이야기에 깊이 빠져 있다.
정적인 이 그림에 활기를 넣어주고 있는 건 급히 벗어 놓은 듯한 신발이다. 그녀는 고된 노동 사이 짬을 내어 책을 읽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아마 그녀가 청소할 때 그녀의 고용주는 책상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그녀는 그런 주인을 부러워했을 테다. 벗어 놓은 신발과 독서 중인 그녀는 화면에서 묘한 대구를 이루며 그녀가 신발로 대표되는 현실 공간을 벗어나 얼마나 먼 곳으로 떠났는지 말해준다. 독서는 힘든 하녀 생활에서 유일하게 가슴 설레고 행복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녀는 신발로 대표되는 세상을 뒤로하고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 문장만이 줄 수 있는 감정과 감각과 이야기의 세상에서 그녀는 여행 중이다.
*안바다 신작 에세이, <나와 당신의 작은 공항> 9월 출간 전 일부 내용을 사전 연재합니다.
*다음은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출간 알람 서비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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