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세 독신자의 비혼 중간평가.
남들 학교 갈 때, 학교 가고,
남들 취직할 때, 취직하고,
남들 결혼할 때, 결혼하고,
남들 출산할 때, 출산하고,
나는 그렇게 살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남들 결혼할 때 결혼하지 않았고,
40대 중반인 지금 독신으로 살고 있다.
35살 때쯤, 정신과 선생님과 업무 미팅을 한 적이 있다.
이때 나는 정신과에 대한 불신이 있었고,
그때 선생님이 나에게 간단한 상담을 해 준 적이 있었다.
선생님 : 요즘 가장 큰 고민이 뭐예요?
나 : 결혼이요.
선생님 : 결혼을 하고 싶으세요?
나 : 저는 딱히 결혼을 안 한 제 상태가 불행하지 않는데, 제가 결혼하지 않아서, 저의 부모님이
불행해하니까. 그게 다시 제 불행으로 돌아와요.
선생님 :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요?
나 : 지금 당장은 안 한 상태여도 괜찮은데, 미래에도 결혼하지 않는 상태면 불행할까요?
그런데, 결혼해도 불행할 수 있잖아요.
선생님 : 결혼하지 않으면 불행할 것 같아요?
나 : 행복한 결혼이 여야지 행복하지, 불행한 결혼도 많잖아요.
저는 그럴 바엔 혼자 사는 게 더 행복할 것 같긴 해요.
선생님 : 좋은 차를 타면 행복할까요?
나 : 좋은 차를 타면 행복하겠지만, 좋은 차를 타지 못한다고 불행하거나,
좋은 차만으로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선생님 :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남들과 비슷한 환경에 있어야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요. 남의 기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라고 하지만, 남들 학교 다닐 때 학교 다니지 않고,
남들 결혼할 때 결혼하지 않는 본인의 상태를 불안하게 느끼는 것도 당연한 겁니다.
지금은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혼해도 괜찮아 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사실 인간은 몇 천년 동안 결혼하지 않으면 이상한 취급을 받는 사회적 동물이었어요.
그리고 인간도 동물인지라 종족 번식의 본능이 있어요.
언젠가 당연히 내 자녀가 있어야 하고, 아이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다 라는 본능이 있어요.
꼭 결혼이 아니더라도, 언제인가 엄마가 되고 싶다는 마음과 자녀가 없으면 허전할 것 같다는
마음은 들지 않나요?
나 : 전혀요. 저는 아이가 생기면 최선을 다해 양육하겠지만, 당장은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게
오히려 불행하게 느껴져요. 만약에 아이가 생겨서 잘 성장해서 저에게 큰 행복을 줄 수도 있지만,
그건 그 아이의 성취로 축하해야 할 일이지, 저의 행불행과는 상관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 : 내담자처럼 사회적 기준과 시선에 충족되는 것에 본인의 행복이 좌지우지되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불행해지지는 않아요.
본인이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나, 본인의 기준에서 좋은 결혼이라는 생각이 들 때 결혼하면 돼요.
부모님은 가족관계에서 주는 안정감과 충만함을 알고 계시고, 느끼고 계시고, 또 보편적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있으신 분이니까 내담자가 결혼하지 않은 상태를 큰 결핍과 불행
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어요. 누가 맞고 틀리고 가 아닌 거니까, 계속 설명해드려야 해요.
나 : 네, 감사합니다. 제가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게 이상한 게 아녔군요.
오... 이런 것도 상담할 거리가 되는군요.
선생님 : 내담자분은 본인의 삶을 피폐하게 할 만큼 심각하게 그 고민에 몰입된 건 아니지만,
어떤 분들은 자신들의 감정이나 고민에 과민하게 빠져드는 경우도 있죠.
그런 성격이나 성향이 태어날 때부터나 혹은 살면서 생길 수도 있고요.
저희는 그런 것에서 좀 벗어나거나, 편안해지도록 도와드리는 거고요.
나 : 네, 그럴 수 있겠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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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신과 선생님과의 대화 이후 나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보니
나는 일주일 동안 아무하고도 말을 섞지 않아도 우울해지지 않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크게 불행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누군가에게 애정을 계속 쏟아야 하는 상황이 더 부대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그 사람에게 감정을 쏟아도...
그 시기가 길어지면 지쳤다.
그래서,
나는 결혼을 하기 위한 노력,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을 놓았고,
그 이후 굉장히 삶이 편해졌다.
살면서 결혼하고 싶을 만큼 좋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을 만나면 결혼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해야지.
라는 마음으로 사니 남의 집 귀한 아들들을 결혼 상대자로 함부로 평가할 일도 없었다.
그리고 시간 지나 40대 중반이 된 지금 오히려 결혼하지 않는 상태가 꽤 만족스럽다.
밖에서 놀다가, 일하다가 집에 돌아갔을 때,
아무도 없는 집이 좋다.
집에 누군가 있거나, 혼자 집에 있는데 누군가 돌아오는 게 예정되어 있다면
오히려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이건 강동원이나 공유여도 그럴 것 같다. 누군가 놀러 오거나, 머물다 가는 건 괜찮지만
함께 오랫동안 사는 건 좀 부담스럽다.)
나는 100평짜리 집에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것보다
20평짜리 집에 혼자 있는 게 더 좋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은 가끔 만나고 집에 가면 혼자 있고 싶다.
(반대로 100평 집에 혼자 사는 것보다 20평 집에 6식구가 사는게 행복하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결혼을 하는게 맞는 것이다. )
꽤 좋은 남편을 만나서 경제적으로도 더 윤택해지고,
정서적으로도 더 응원받고 지지받는 행복한 결혼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친구를 봐도
부럽기는 하지만, 나를 그 결혼에 대입해 보면 그렇게 행복할 것 같지 않다.
결혼을 안 해도 행복하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혼자라는 것에 비참함을 느끼지 않아야 하는데, 나는 그런 편이었다.
응급실에 혼자 가도, 남편한테 명품 선물을 척척 받는 친구를 봐도.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도, 나는 비참하지 않았다.
아직은 괜찮지만, 70, 80대가 되어서 가족이 없으면 불행할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때가 되면 독신의 삶이 불행할 수 있겠지만, 그때를 위해 지금 하고 싶지 않은 걸 하는 것도 별로다.
그리고 시골 프로그램을 다년간 한 양희은 선생님 말에 의하면
5년간 수 없이 많은 할머니를 만났는데, 밝은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할머니라고..
어떤 할머니는 "환갑 넘어 과부는 오복 중에 하나"라는 말을 듣고.
노년에 독신의 삶도 그렇게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혼자 살아도 되는 특성으로 가득 찬 사람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삶이 행복한 사람이 세상엔 더 많을 것 같다.
내가 모르는 행복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나는 그런 행복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들 때문에 불행하다 느낄 사람이지만,
행복을 위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더 참다운 인생을 사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지나온 나의 독신생활을.
그리고 지금 현재 우리 집 공기를 나 혼자 쐬는 것.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잠들고 깨어나는 것에 매우 만족한다.
p.s. 옛날 사람인 우리 엄마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않은 나에게
결혼을 하지 않으면 남편에게 의탁하지 않은 채 어떻게 노년까지 먹고살려고 그러냐라고 했다..
나 먹여 살리려고 나와 결혼해 줄 남자도 없을 테고,
나 스스로 경제적 능력이 없는 채 하는 결혼은 남편에게 큰 부채감을 가진 결혼생활이 될것이다.
애초에, 누군가는 돈을 벌어와야 하고, 누군가는 집안일을 해야 하고
그런 기능으로의 결혼은 너무나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