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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gCaptain Dec 17. 2022

국가는 전쟁을 잘하기 위한 조직인가?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는 헛소리를 향해 한마디 하자.

국제정치는 국가들 사이의 정치이다.

서로 상대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들이 모여 이룩한 국제사회에는 국가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할 때 이를 권위를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상부의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무정부 상태’라고 부른다.

어찌보면, 국제체제는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이다. 그런데 무정부 상태에서도 질서가 존재한다. 그 질서는 힘에 의해 유지되는 질서이다.

막강한 힘을 가진 국가에 의해 유지되는 질서가 국제질서인 것이다.


국제정치에는 언제라도 폭력이 난무할 수 있는 구조이다. 여기서 폭력이란 전쟁을 의미한다.

1816년부터 20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존재했다가 멸망해서 없어져 버린 나라가 66개국이며, 없어진 이들 나라들 중에서 75%인 50개 국가의 멸망 이유가 이웃 나라에게 맞아 죽었다. 즉, 침략과 전쟁 등의 폭력적 방법에 의해서 사라졌다.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죽음이란 예상보다 훨씬 흔한 일이며 그래서 모든 국가들은 국가의 존속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넓게는 국제정치 연구, 좁게는 전쟁연구, 포괄적으로는 국가안보 연구라는 것을 그래서 하는 것이다.


국가는 전쟁을 잘하기 위해 발달된 조직인가?

국가는 물리적 폭력의 정당한 행사를 위임받은 유일한 조직이다. 국제정치가 무정부로 남아 있는 한 국가가 무장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당대 세계 최고의 강대국들은 모두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했던 나라였다. 그들 강대국은 당대에 가장 전쟁을 잘 할수 있는 조직이었다 .

강대국이든 그렇지 않은 나라이든 국가는 본질적으로 전쟁을 하기 위한 조직이다.


과거 조선시대 임진왜란 직전에 전쟁을 준비하자고 역설했던 십만양병설의 율곡 이이를 우리는 지금 미쳤다고 생각하는가?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이순신 제독을 우리는 지금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한다.

군사력과 군인의 존재는 전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역설을 잘 알아야 한다.


미국 전략공군사령부(strategic air command)의 정문 부근에는 “평화는 우리의 직업(peace is our profession)” 이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찰스 틸리(charles tilly) 교수는 국가는 전쟁의 산물이며 전쟁의 산물인 국가를 극적으로 상징하는 명제를 만들었다.

“전쟁은 국가를 만들고 국가는 전쟁을 한다.” (war made the state and the state made war)


이 세상의 모든 국가들은 전쟁을 잘하는 조직으로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웃 나라의 침략 대상이 되고 패배하면 나라의 목숨조차 없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결국 전쟁을 잘하는 나라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쟁은 국가가 존재하는 한 국제사회가 존재하는 한 회피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국가의 일이다.

영국의 마이클 하워드는 그의 저서 “전쟁과 평화의 연구(studies of war and peace)” 에서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란 도저히 피할수 없는 악이다. 그러나 군사력의 사용을 포기한 자는 곧 자신의 운명이 군사력을 포기하지 않은 자의 손아귀 속에 들어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국가는 전쟁을 잘하기 위한 조직이 맞다.“

이렇게 말하면 특히 대한민국 사람들, 그 중에서도 소위 지식인이나 오피니언 리더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못하거나 믿지 않거나 믿지 않으려고 한다.

심지어는 진보 또는 좌파계열로 구분될 수 있는 일부 정치인들은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 라는 식의 발언을 마치 자신이 평화주의자인 것처럼 발언한다.

그런데 이 나라 국민들이 중국이나 일본, 심지어 북한 주체사상 정권에 속하여 사는 것이 전쟁보다 나은 나쁜 평화라는 말로 덮어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과연 그들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하다.

중국이 제주도를 점령하겠다고 침략하고, 일본이 독도를 무력으로 점령하기 위하여 도발을 해온다면 그때 우리는 평화를 위해서 그 섬들을 양보할 것인가?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분명히 평화를 원한다. 사실 그게 가장 좋은 것이니까.

전쟁을 통해서 서로를 때리고 상처내고 죽이고 부상을 입히고 파괴하고 얻는 영광이 과연 얼마나 유익하겠는가?

그래서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국가가 가지는 국제사회에서의 위치가 그러하다.


대한민국은 전쟁이 휴전상태에 빠진 것이 1953년 7월 27일 이후 70년이 거의 다 되었다.

전쟁을 겪었던 세대가 이제 조금만 지나면 이 나라에서 모두 육체의 삶을 마감할 것이다. 1953년생이라면 70세이다. 그들 세대가 모두 사라지고 나면 우리 국민들은 전쟁에 대한 경험은 사라지고 모두 책으로나 배울 수 있고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을 겪어본 분들은 다시는 전쟁을 겪고 싶지 않다고 하신다. 돌아가신 내 아버지가 그랬다. 전쟁통에 가족들과 헤어져 평생을 월남한 실향민으로 사셨다.

그런데 만약 그 아버지에게 우리가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를 위해서 뭔가를 양보하고 했다면 좋겠냐고 물어보면 아버지는 뭐라고 하실까?


대한민국의 진보나 좌파 정치인들이나 민주화운동을 지나서 의식화되고 사상화된 50~60대는 과연 평화와 전쟁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몇년전 대통령이었던 사람이나 그 이후 대통령후보였던 민주진영(?? 좌파 or 진보)의 사람들은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 라는 말을 아무런 고민없이 내뱉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건 완전히 말 장난이고 그 진의를 이해하기 어렵다. 한편으로 보면, 전쟁을 통한 어느 일방의 상대방에 대한 점령이나 침략이나 합병 등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어떻게든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이니 통합이니 교류니 하는 것을 이루자고 하는 생각에서 말했을 것으로 이해한다.

사실 그게 가능한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이 가능할까? 서독과 동독이 겉으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이룬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안에는 수십년을 전쟁 직전의 상황에 놓이기도 했고, 겉으로 보이는 평화의 이면에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전쟁의 위험을 감수했다.

특히나 한반도에서 남과 북은 절대로 독일처럼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평화적으로 통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전쟁은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다. 평화는 목표다.

두 개념은 같은 차원의 용어가 아니다. 그래서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국가는 자신들의 기준에서 “더 좋은 평화”를 위해서 때로 전쟁도 불사한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합병된 식민지로 살았던 대한제국이 과연 전쟁보다 나은 나쁜 평화인가?

그렇다면 왜 항일 무장투쟁은 그렇게도 불같이 일어났는가? 그 좋다는 나쁜 평화를 왜 국민들은 받아들이지 못했는가?


국가간 국제체제에서 “전쟁보다 나은 나쁜 평화” 라는 개념은 그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평화라는 목표를 위해서 전쟁이라는 수단을 각오하고 대비하는 그래서 그 전쟁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조직되어야 하는 생명체이다.


그런 국가의 전쟁 대비 조직이 무뎌지고 약해지고 느슨해지면 평화를 절대 지킬 수 없다.

특히 북한과의 평화적 통일(?)을 소망 내지 희망하는 사람들은 매우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거나 알면서도 그들의 통일방식에 동조하고 있는 사실상의 간첩 내지 이적행위자임이 명백하다. 그래서 그들과의 평화니 교류니 지원이니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강하게 밀어부쳐야 한다고 믿는다.

북한정권은 대한민국의 민주진영(?)(좌파 or 진보) 정치인들이 말하는 평화를 과연 똑같이 생각할까? 절대 아니다.

북한정권은 자신들의 평화를 위해서 핵도 미사일도 개발하고 군비를 증강하고 있다.

그런데 민주진영들께서는 국방력 강화에는 관심없고 그저 평화적인 방법의 통일을 위한 ‘같은 민족, 한 민족, 동포’ 라는 망상적인 사고방식에 취해했다.

어쩌면 취해 있기 보다는 대한민국이 아닌 북한정권의 하수인으로서의 역할을 뼈속깊이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평화를 원하는가? 전쟁을 대비해라.

전쟁을 대비하는 것과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다르다.

대한민국은 지금 전쟁을 대비할 수 있는 국가조직이나 국가시스템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된다.

전쟁보다 나쁜 평화가 낫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너와 너의 자녀들과 가족들이 북한정권 또는 중국이나 일본의 식민지 아니면 미국의 식민지 국민으로 사는 것을 바라는가?

어쩌면 그럴수는 있겠다. 패망한 자유 베트남의 비리 정치인들이 했던 것처럼 돈 싸들고 해외로 망명하고 호의호식하려고 하는지도.


국가는 전쟁을 잘하기 위한 조직이 맞다.

평화를 위한 대비이다. 침략전쟁을 위한 준비가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평화이다.

국제체제에서 평화는 말로만 이루어지는 세계가 아니다.


(위 글은 이춘근 박사의 저서 “전쟁과 국제정치”의 일부를 발췌하여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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