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레시피 - 2편]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70대 오씨 어르신은 새의 기억을 찾아가는 닭에 대해서 말했다.
“닭을 풀어 놓고 키웠더니, 갸들이 막 날아다녀. 잡아 묵고 싶어도 나무 위로 도망가니깐 방법이 읎지. 자네들이 와서 닭을 좀 잡아 가.”
잡을 수 있으면 닭을 여러 마리 가져가도 된다는 파격 제안. 현장에 있던 우리 젊은것(?)들은 서로 눈을 부딪쳤다.
‘닭 잡으러 가자!’
경기도 화성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노가다’ 하던 15년 전 일이다. 노가다 동료(?) 오씨 어르신의 집은 현장과 가까웠다. 어르신과 달리, 우리 젊은것들은 닭보다 빨랐다. 토종닭 몇 마리를 생포해 준비해 간 쌀자루에 담았다.
어깨에 쌀자루를 짊어지고 건설 현장 숙소로 돌아오는 길. 닭은 살겠다고 몸부림 쳤지만, 내 안에서는 다른 의지가 불탔다.
‘나는 오늘 닭의 목을 끊을 것이다.’
숙소에 가까워질수록 비장감은 줄고, 불안감은 커졌다. ‘닭의 목을 끊겠다’는 생각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으로 교체됐다. 나는 닭처럼 떨었다. 숙소에 도착하자 여러 ‘노가다꾼’이 내게 말했다.
“어이, 보신탕집 막내아들! 빨리 닭 잡아. 너 아니면 누가 잡냐. 빨리 목 따.”
그 놈의 입이 문제다. 닭 생포하러 갈 때 공언했다. 닭의 목은 내가 따겠다고. 한 번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숙소 부엌에서 칼을 가지고 나왔다. 쌀자루에서 닭 한 마리를 꺼내 왼손으로 날개를 잡고 닭의 목을 뒤로 제꼈다. 오른손에 꽉 쥔 은빛 칼을 닭 목에 댔다.
‘단 한 번... 딱 한 번... 이 칼로 닭의 목을 그으면 된다.’
칼 쥔 오른손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닭의 날개와 목을 쥔 왼손으로 녀석의 체온이 느껴졌다. 따뜻했다. 닭은 종종 몸부림쳤다. 노가다 일꾼이 망설이는 나와 몸부림 치는 닭을 숨 죽이고 바라봤다. 나는 칼을 쥔 오른손에 힘을 주고 이를 앙다물었다.
‘딱 한 번이면 된다.’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스윽 한 번 그으면 끝, 그러면 이까짓 닭대가리 삶도 끝. 은빛 칼을 다시 닭의 목에 댔다. 오른손 대신 입이 움직였다.
“못 하겠습니다. 아저씨가 죽이세요.”
나는 옆에 있던 아저씨에게 닭과 칼을 건넸다. 노가다 현장에서 ‘해병대 아저씨’로 통하는 분이다. 해병대 아저씨는 ‘이까이꺼’ 일도 아니라는 듯 순식간에 닭 여러 마리를 해치웠다.
닭의 목을 따는 일, 꼭 직접 해보고 싶었다. 동물 살육을 좋아하거나, 짐승 피 보는 걸 즐겨서가 아니다. 피에 젖은 아버지의 붉은 손과 짐승 비린내, 그 지울 수 없는 기억 때문이다.
내 엄마이자 당신의 아내를 옆집 총각에게 빼앗긴(아버지의 처지에서 보면) 아버지는 패배한 ‘수컷’이었다. (아버지의 레시피 1편 참고) 사람을 동물에 비유하는 건, 특히 아버지를 그렇게 표현하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지만, TV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 속 패배한 수컷과 아버지는 많이 닮았다.
사랑을 잃고 휘청인 아버지는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했다. ‘외로움’이란 말이 뭔지도 모르는 8~9살 나를 앉혀두고 아버지는 “너무 외롭다”며 엉엉 울기도 했다. 때로는 집을 나가 며칠씩 돌아오지 않았다. 산골 집에 어린 나만 남겨두고 말이다.
그토록 나약했던 아버지는 역설적이게도 무자비한 칼잡이었다.
우리집은 메인으로 보신탕, 사이드로 토종닭과 오리를 요리해 파는 식당이었다. 손님들이 닭과 오리 등을 주문하면, 현장에서 산 닭과 오리를 잡았다. 닭, 오리의 목숨을 끊는 건 아버지의 몫이었다. 아버지가 손에 피를 묻혀야, 손님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마을에서 잔치를 하면 꼭 돼지, 염소 등을 잡았는데 그건 보통 일이 아니다. 기술자만이 칼을 잡을 수 있다.
마을의 칼잡이는 아버지였다. 은빛 칼을 오른손에 쥔 아버지 앞에 돼지 한 마리가 등장하면, 동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지난 밤 외롭다며 울던 아버지는 돼지 앞에서 떨지 않았다. 우는 건 돼지였다.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 보는 앞에서 능숙한 칼놀림으로 돼지를 잡았다. 1980년대 초반, 그 산골에서 고기는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쥔 은빛 칼이 붉게 젖으면, 동네 사람들의 눈은 저 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아버지 앞에서 한 마리의 돼지는 순식간에 고기로 변신했다. 아버지의 손이 피에 물들고 온몸에서 짐승 비린내가 진동해야 비로소 마을에 고소한 고기냄새가 퍼졌다.
패배한 수컷의 강렬한 핏빛 퍼포먼스. 사랑을 잃은 남자의 손에서 지워지지 않던 짐승 비린내. 나는 그걸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으며 자랐다.
‘아버지, 도대체 산다는 건 뭡니까.’
사랑을 택해 집과 가정을 떠난 엄마의 화양연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사랑이 떠나가도 사람은 먹고 살아야 하는 법. 엄마는 목욕탕의 때밀이가 되어 삶을 밀어 갔다. 달콤한 사랑을 택한 여자가 끝내 손에 쥔게 고작 때수건이라니. 사랑 뒤에 찾아온 것이 타인의 몸에 붙은 때라니.
‘어머니, 도대체 사랑이란 뭡니까.’
사랑 뒤의 쓸쓸함이 진해 보였지만, 나는 엄마의 삶을 비참하게만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의 선택과 사랑은, 엄마의 몫이니까. 어쩌면 엄마는 옆집 총각과의 그 짧은 사랑의 힘으로 평생을 버텼는지도 모른다.
시인 고정희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 한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라고 말이다.
아버지의 피에 젖은 손, 때에 절은 엄마의 손을 오가며 자란 나는 두 손으로 노트북 자판 두드리는 기자가 됐다.
오래전 어느 날이었다. 능숙하게 노트북 자판 두드리며 기사 쓰는 내 손이 너무 곱고(?) 부드러워(?), 나는 주먹을 쥐고 손을 감췄다. 갑자기 피에 젖은 아버지의 붉은 손에 대한 질투심과 열등감으로 몸이 뜨거워졌다. 잡식주의자 주제에, 손에 피 한 번 안 묻혀봤다니.
노가다 현장에서 닭 살육에 실패한 이후, 열등감을 풀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치킨과 맥주를 즐기고, 삼겹살에 소주를 먹으며, 가끔 스테이크를 썰지만 손에 피 묻힐 일은 없었다. 그러다 산골 친구 덕에 다시 기회가 왔다.
산골에 사는 친구는 닭을 여러 마리 키웠다. 유정란이나 얻는 일종의 ‘반려 닭’이었다. 닭들은 마당을 자유롭게 거닐며 잘 자랐다.
친구 부부와 나는 그 닭들을 종종, 그리고 오랫동안 바라봤다. 살아 있는 닭들의 공동체 모습은, 시원한 맥주와 함께 먹는 치킨 맛보다 감동적이었다.
친구 부부가 마당에 모이를 뿌리면 저쪽에서 가장 빨리 힘차게 달려오는 건 수탉이었다. 먼저 도착한 수탉은 모이를 먹지 않았다. 꼬꼬댁 마구 울기만 했다. 그러면 저쪽에서 암탉들이 마구 달려온다. 암탉이 도착하면 수탉은 뒤로 살짝 빠진다. 암탉은 열심히 모이를 먹지만 수탉은 별로 먹지 않았다.
먹을 때만이 아니다. 동네 개가 줄에서 풀려 닭들을 공격하면 수탉은 가장 먼저 ‘꼬꼬댁’ 경고음을 울려 암탉을 피신시킨 뒤 자신은 가장 늦게 도망갔다. 한겨울, 추위가 닥치면 수탉은 따뜻한 곳에 암탉을 몰아넣고 자신은 가장 추운 곳을 지켰다. 수컷인 내가 봐도 그런 수탉의 모습은 위대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병아리일 땐 몰랐는데, 친구네 닭들의 공동체에는 수탉이 둘이었다. 작은 규모의 닭 공동체에서 수탉 두 마리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 두 수탉 사이에 양보 없는 피를 부르는 싸움이 이어졌다.
끝내 한 녀석이 패했다. 패한 수탉은 끝없는 괴롭힘과 핍박을 받았다. 그 몰골은 처참했다. 패한 수탉을 위한 세상은 없다. 산골에서 어디 입양 보낼 곳도 없었다. 길은 하나, 잡아야 한다. 녀석을 키운 친구 부부가 그걸 할 순 없었다. 노가다 현장에서처럼 내가 나섰다.
D-day가 잡혔다. 한시절, 내가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봤던 그 수탉을 마당에서 생포했다. 다시 두려움이 커졌다.
수탉의 두 날개를 뒤로 젖혀 내 왼손으로 꽉 잡았다. 목도 뒤로 젖혔다. 녀석의 따뜻한 체온이 내 왼손에 가득 퍼졌다. 오른손으로 칼을 쥐었다. 은빛 칼을 녀석의 목에 댔다. 녀석은 종종 몸부림쳤다. 나는 작게 말했다.
“미안하다.”
내 목소리는 떨렸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 동안 내 오른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의 따뜻한 체온이, 털의 감촉이 내 왼손으로 전해졌다. 잠시 뒤, 오른손에 쉰 칼로 녀석의 목을 그었다. 피가 흘러 내 왼손이 붉게 젖었다. 따뜻했다.
녀석은 간헐적으로 몸부림쳤다. 난 왼손의 힘을 풀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녀석의 몸은 식어갔다. 몸부림도 약해졌다. 한 생명이 꺼져가는 게 내 왼손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윽고 녀석의 몸이 축 처졌다. 위대했지만 싸움에서 진 수컷은 내 손에서 생을 마감했다.
우라질, 그 순간에 아버지가 생각날 줄이야.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죽은 수탉을 땅에 내려놓지도 못한 채, 나는 아버지를 곱씹었다.
어린시절 아버지 어깨 너머로 본 대로 어설프게나마 닭을 손질했다. 내 손이 붉게 젖었다. 비린내도 났다. 친구 부부는 내가 죽인 수탉으로 백숙을 끓였다. 비린내 나는 손으로 나는 닭다리를 뜯어 먹었다. 맛있었다.
열등감이 해소되었거나 ‘나도 해냈다’는 따위의 생각은 들지 않았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느낌만 여전히 생생하다.
너무 잔인하지 않냐고? 어쩔 수 없다. 나는 기회가 되면 또 닭을 잡을 생각이다. 내가 치맥으로 하루 피로를 풀고, 복날이면 몸보신으로 어린 닭을 먹는 이상, 손에 피 묻히는 일은 피할 수 없다. 대단한 가업은 아니지만, 그건 아버지의 붉은 손이 내게 남긴 숙명같은 일이다.
사랑 외에 가질 게 별로 없는 가난한 사람은 자기 일상을 손에 새기며 살아간다. 아버지의 붉은 손, 엄마의 때에 전 손은 그런 결과물이다. 사랑을 잃든, 얻든, 어쨌든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그 죽일놈의 사랑은 짧지만, 먹고 사는 일의 지겨움은 죽어야 끝나니까.
고단한 삶이 새겨진 아버지, 엄마의 손은 한 가지 진실을 말해준다. 그 시절, 아버지의 손이 피에 젖어야만 사람들은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엄마 손을 거친 사람들은 깨끗한 몸으로 목욕탕을 나섰다. 이건 팩트다.
노트북 두드리는 내 손은, 두 사람이 했던 것만큼 세상을 이롭게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