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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계인 Jul 07. 2024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Mark Rothko - No. 2 (1962)



0과 100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여느덧 고꾸라져버린 밤

전부를 원하는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질 알수 없어 둥둥 뜬 외로움이 종이 위 단어들로 떨어졌다

너는 왜 쓰냐고 물었을때

자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어떤 파장을 남길만한 것이란 확신이 느껴졌던 그 아이

이야기란, 세계를 짓는 일, 새롭게 세우는 일

그런데 왜 무너져 내리고 싶을까

한강을 읽는 건, 흘러 내리는 익숙한 슬픔에 삼켜지지 않는 안전한 공간을 빚는 일

(아니. 기꺼이 그 슬픔의 입 속으로 달려가는 일일까? 나를 집어삼켜줘)

한강이 쓰는 건, 고요한 압력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흰 쌀밥을 짓는 일

고요와 폭발


아마도 10년 전에 내가 밑줄 쳐 둔 문장들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시 마지막에 '아픔을 뚫고'라고 선명한 볼펜으로 감상을 남긴것

그때 어떤게 아팠었더라 

희미해진 아픔과는 달리 영엉 박혀버린 말의 조각

아픔을 펄펄 끓여 이런 시를 지을 수 있다면

그 아픔은 뚫고 지나올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 될까




한 사람의 영혼을 갈라서

안을 보여준다면 이런 것이겠지

그래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이다

붓 대신 스펀지로 발라

영원히 번져가는 물감 속에서

고요히 붉은

영혼의 피 냄새


이렇게 멎는다

기억이

예감이

나침반이

내가

나라는 것도


(...)


만져지는 물결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의 피


스며오르는 것

번져오르는 것 


피투성이 밤을 

머금고도 떠오르는 것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 영혼의 피


- 마크 로스코와 나 2


실핏줄이라는 단어가 만들어 낸 어떤 역동성. 왜?

잔잔하게 번지는 이미지와는 대비되는 그 좁은 공간을 뚫고 흐르는 격동, 급진, 충동, 심박이 느껴졌던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


그러니까 내 말은,


안녕.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심이야.


    후회하고 있어.


    이제는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아.


*


통증을 모르는

차가운 머리카락과 손톱들이 있다.


손가락 관절들이

다정하게

고통에 찬 말을 걸어온다


*


몸속에 맑게 고였던 것들이

뙤약볕에 마르는 날이 간다

끈적끈적한 것

비통한 것까지

함께 바싹 말라 가벼워지는 날


겨우 따뜻한 내 육체를

메스로 가른다 해도

꿈틀거리는 무엇도 들여다볼 수 없을


다만 해가 있는 쪽을 향해 눈을 잠그고

주황색 허공에

생명, 생명이라고 써야 하는 날


혀가 없는 말이어서

지워지지도 않을 그 말을


- 해부극장 2


물컹거리는것(아마도 abject)와 말라버리는것(아마도 우울) 그 사이. 차이. 아니면 그냥 인과. 결국엔 말라버리는 것들. 내 몸.




슬픔이라곤

이미 흘러나간 자국뿐


- 피 흐르는 눈 4




연시가 많다는 것. 흐름과 마름의 대비. 말라버린것들을 그대로 두고 갈 수가 없어 다시 흐르게 하는 것. 1,2,3,4 계속해 찾아온 마음. 어떤 시들은 6에서 12로 넘어가기도 ('개의 이야기'). 그리고 '서울의 겨울'은 12만 덩그러니 남은. 6과 12 사이에서. 1과 12 사이에서. 작가는 무엇을 삼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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