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집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주위는 이미 어두웠다. 호찌민으로 가는 차 안에서 눈을 애써 감았다. 바퀴에 걸리는 돌부리의 느낌이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비포장 도로를 열 시간가량 달리는 동안 밖은 내내 검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여정, 열아홉 살 리티미는 자신의 삶이 꼭 오늘 밤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은 틀렸다. 적어도 리티미가 겪은 데 비추면 그렇다.
"불행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한 이유로 불행하다."
가난한 집 장녀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가 헤어지고, 망나니 같은 새아빠가 나타났다. 바쁜 부모 대신 아버지 다른 동생들 키우느라 손은 거칠어졌지만 돌아오는 건 눈칫밥뿐이다. 성적이 좋지만 학교를 그만뒀고, 공장에서 밤새워 일해 번 돈은 고스란히 동생들 학비로 들어갔다. 고작 열아홉, 먼 타국으로 시집을 간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리티미는 자신의 삶을 생각했다. 불행은 단 한 번 쉬는 법이 없는 파도처럼 리티미의 삶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89년생 리티미
리티미(현재 29)는 1989년 베트남 까마우(Ca Mau) 성에 있는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까마우는 베트남의 58개 성(광역행정구역 단위) 중 최남단으로, 메콩 강 삼각주에 자리한다. 한국으로 치면 전남 해남군 땅끝마을과 같은 위치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땅끝에 살면서도 리티미는 어려서 바다에 가본 기억이 없다.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아 닿을 수 있는 범위가 그녀의 세계였다.
"베트남에서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하롱베이 가봤냐, 어디 가봤냐 꼭 물어요. 당연히 못 가 봤지. 학교도 못 다니는데 그런 데 어떻게 다녀."
삶이 녹록지 않았던 건 경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눈칫밥 주는 새아빠, 대화가 시작되면 꼭 언쟁으로 끝나는 엄마와의 관계가 더 힘들었다.
"엄마, 나 내일 뭐 사야 되는데 돈 주면 안 돼?"
"아빠한테 가서 달래."
“싫어, 엄마가 줘.”
“싫으면 말든가.”
“알았어. 엄마 돈도 필요 없고 엄마도 필요 없고 다 필요 없어. 나 없어지면 되는 거지?”
“가! 다시는 오지 마!”
욱하는 마음에 뛰쳐나갔다. 단 하룻밤의 가출이었다. 집에 돌아온 리티미를 반기는 사람은 없었다. 리티미는 학교를 그만두고 타지로 떠났다. 남들이 고등학교 다닐 시절, 리티미는 쥐포 가공 공장에서 생선 대가리를 잘랐다.
집에서 멀어졌다고 엄마한테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엄마는 자꾸만 전화를 걸어 돈타령을 했다. 마침 동네에 한국으로 시집간 친구가 솔깃한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으로 시집가면 어때? 남편 잘 만나면 친정에 도움을 좀 줄 수 있어."
새우 양식을 하던 부모님은 빚을 많이 졌고, 두 여동생은 아직 초등학생이었다. 당시 TV나 신문에서는 국제결혼에 대한 흉흉한 보도가 심심치 않았지만, 잘만 하면 집안 살림 필 수 있다는 희망이 더 컸다.
12월 어느 날, 옷가지 몇 벌 챙겨 집을 나왔다. 자신의 인생이 컴컴한 밤길을 닮았다고 생각한 그날 밤이다.
한국행을 희망하는 베트남 여성들은 결혼정보업체에의 기숙사에 모여 살았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 머물며 순서를 기다렸다. 한국에서 남성들이 단체로 오면 소개팅이 성사된다.
기숙사에 들어간 지 5일째 되는 날 저녁, 리티미 차례가 돌아왔다. 소개팅은 소형 버스에서 이루어졌다. 소개팅 버스에 오르기 한 시간 전, 리티미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집에 갈래. 여기 있기 싫어."
여성 열댓 명이 버스 안에 앉아 있으면 한국인 남성들이 한 명씩 들어왔다. 남편은 통역사, 매파, 시누이와 함께 버스에 올라왔다. 남편이 나를 찍자, 통역사가 대답을 재촉했다. 만난 지 5분도 안 돼서, 곁눈질로 슬쩍 본 그 사람과의 결혼이 결정됐다.
세 시간 후, 리티미는 엄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결혼해."
첫 만남부터 결혼식까지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장난도 아니고, 싶었죠. 그날 밤은 제가 난생처음으로 고민한 때에요. 19년 만에. 그 전엔 무슨 걱정 때문에 밤 샌 적이 없었어요. 내가 이 사람을 잘 선택한 건가? 너무 조급하게 결정했나? 연애하고 결혼해도 고민하는 사람 많은데, 우리는 보자마자 결혼하잖아요. 오죽하겠어요."
집 떠난 지 일주일,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다음 날은 아침부터 바빴다. 건강검진을 받고 예식장에 들어섰다. 오후엔 근처 공원에서 웨딩 사진을 찍고 신혼여행지로 출발했다. 신혼여행지는 리티미가 쥐포를 만들었던 붕따우였다. 신혼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남편은 적극적이었다. 결혼정보업체에서 준 베트남어 책자를 펼쳐 놓고 신혼부부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 김성인
스무 살 봄, 한국 땅을 밟다
서류 절차를 끝내고 입국했다. 처음 겪는 쌀쌀한 날씨에 몸이 떨렸다. 충북 보은군으로 내려오는 길, 예쁜 집이 보이면 리티미는 '여기가 우리 집일까' 생각했다. 차는 쌩하고 그 집을 지나쳤다. 남편은 "다 왔다"는 말만 반복했다.
마을 어귀에 접어들자 시골집 마당에 할머니 한 분이 나와 계셨다. 리티미가 탄 차를 쫓는 눈길을 보니 시어머니였다. 시누이가 알려준 대로 마당에서 절부터 하려고 했다. 시댁 식구들이 한바탕 웃으며 "방에 들어가서 하라"고 말렸다.
신방 문을 여니 침대 위 분홍색 이불이 화사했다. 깨끗하고 예뻤다. 인테리어 일을 하는 둘째 아주버님이 새색시 온다고 방을 꾸민 것이다. 도배도 새로 싹 하고 등도 갈고, 옷장도 새것이었다.
리티미는 베트남에서 한 번, 한국에 와서 또 한 번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에서 식을 올릴 땐 합동결혼으로 같은 날 한국에 온 베트남 여성들과 그 남편들이 신부 친구 자리를 채웠다. ⓒ 김성인
남편은 종일 논에 나가 밤늦게 돌아왔다. 자기 집에 일이 없는 날에는 다른 집으로 품앗이를 갔다. 집엔 종일 시어머니와 리티미 둘뿐이었다. 스무 살 리티미는 너무 심심해 마루에 앉아 매일 울었다.
시어머니는 1932년생, 당시 77세였다. 열여덟 살에 시집와 그 동네 그 집에서 60년을 살았다. 막내아들이 늦장가 가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어린 며느리가 하는 짓마다 미웠다. "하늘 같은 남편" 머리카락을 매만지지 않나, 벌건 대낮에 손을 잡지 않나.. 동네 사람 보기 창피했다.
임신했다고 먹고 싶은 걸 자꾸 보채고, 아기 낳고는 허구한 날 일회용 기저귀 쓰고. 면 기저귀 쓰라니까 세탁기를 하루에 두 번씩 돌리는 며느리를, 77세 시어머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색시가 아양 떤다고 다 들어주는 아들놈도 한심한 건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한국어를 전혀 모르던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이게 강조했다.
"어머니에게는 며느리한테 아들 빼앗긴 느낌이었나 봐요. 한 번은 저랑 얘기하다가 아이 아빠가 크게 웃었어요. 어머님 하는 얘기가, 결혼 전엔 말도 안 하던 놈이 결혼하니깐 '헤헤' 하고 다닌다고 그러셔요."
리티미는 언어에 소질이 있었다. 한국말이 날로 늘었다. 시어머니에게 된통 꾸지람을 들은 어느 날이었다. 리티미는 남편을 붙잡아 놓고 물었다.
"남편도 그렇게 생각해?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고?"
"누가 그래?"
"왜 그런 말이 있는 줄 알아? 그건 남자가 더 높고 여자가 더 낮고 그런 게 아니야. 하늘이 없으면 땅이 없고, 땅이 없으면 하늘이 없다. 그러니까 서로 없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거지."
"으이구 잘 났네~"
시어머니는 자주 당신이 살아온 세월이 억울하다고 말했다. 가끔 술이 한두 잔 들어가면 어린 며느리 손을 안쓰럽다는 듯 쓰다듬으며 말했다.
며느리야, 넌 왜 이렇게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왔니
리티미는 한국말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 글도 곧잘 썼다. 2013년, 뱀띠 해를 맞아 보은군의 한 주간지에서 뱀띠 결혼이주여성 필자를 모집했다. 리티미는 주민기자가 돼 '베트남 여성의 좌충우돌 한국살이'라는 제목으로 2013년 2월 28일부터 매주 한 편씩 칼럼을 썼다.
베트남어로 일기도 안 쓰는 리티미에게 한국어 칼럼은 도전이었다. 편집기자와 주제를 의논하고,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데 재미가 붙었다. 동네에서 유명해지자 더 잘 쓰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리티미는 결혼이주여성 시선으로 보는 일상을 칼럼으로 풀어냈다. 제사와 고부갈등, 외국인이 겪는 차별의 시선, 아이들 언어 교육 문제, 농사철 농촌 풍경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녹여냈다.
"일 년 내내 덥기는 하지만 한국의 여름 날씨처럼 습하진 않아서 베트남에서 살았을 땐 더웠다는 기억조차 없었다. 여기서는 봄이 되면 꽃이 피고 모든 식물이 탄생하기 시작하고, 나처럼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분들은 일손이 바빠진다.
결혼 전에 베트남에 있었을 땐 이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지금 시간을 되돌려보면 나는 많이 달라지고 있다. 겨울이면 흰 눈을 볼 수 있어서 신났던 내가 이젠 시간이 지나니 봄의 냄새가 더 그립다. 사계절 없는 나라에서 자랐기 때문에 초록색의 소중함이 몰랐다."
베트남 여성의 좌충우돌 한국살이 3 '베트남에선 초록의 소중함을 몰랐어요' 中 발췌
리티미가 일 년 넘게 쓴 칼럼 중 일부. 남편은 매주 신문이 배달오면 리티미의 칼럼을 찾아 예쁘게 오려 스크랩해뒀다. ⓒ 김성인
칼럼은 2014년 3월 27일, 35화를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리티미는 그즈음 긴 방황을 시작했다.
리티미가 한국에 온 2008년은 농촌 지역에 다문화가정이 일반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은 시기였다. 보은군은 국제결혼 비율로 치자면 당시 전국에서 1, 2위를 다퉜다.
베트남에서 온 이주여성들이 보은군에만 수십 명이 되자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생겼다. 리티미는 일부러 그들과 교류하지 않았다. 한국말을 빨리 익히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또 괜히 남편 비교 시댁 비교하다 보면 초라해지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아이들 어느 정도 키워 놓고 시어머니와도 서로 편해질 때쯤 리티미는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겨울철 농한기에 집 안에 있을 때면 답답했다.
리티미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열대어 양식장에서 물고기를 선별하는 일이었다. 정오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주부들을 위한 일자리였다.
"집에만 있다가 돈 버는 거잖아요. 한 시간 하면 얼마, 곱빼기로 하면 얼마, 한두 시간만 더 하면 또 얼마 벌고.. 나는 그 돈을 갖고 뭘 할 거고, 그때부터 이런저런 생각 많이 해요. 재미가 든 거죠."
난생처음 적금도 들고, 스스로 융통할 수 있는 돈이 생기자 욕심이 났다. 겨울에 조금만 더 고생하면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늘어날 터였다. 리티미는 양식장 일 앞뒤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아침부터 낮 12시까지, 또 오후 5시부터 9시까지. 베트남 친구들이 여럿 생겼고, 술이라도 한잔 하면 자정을 넘기 일쑤였다.
집에만 있던 사람이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니 이런저런 말이 생겨났다. "베트남 며느리가 바람 나서 집 나갔다"는 소문이 그 작은 동네에 파다했다.
남편은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들어오는 아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술에 취해 식당에서 자고 온다는 연락을 받는 날이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애들 엄마가 대체 왜 그렇게 늦게까지 돌아다녀야 해? 당신이 예전에 돈 안 벌었을 때도 잘 먹고 잘살았어!"
리티미 생각은 달랐다. 잘 먹고 잘산 게 아니라, 그냥 번 만큼 먹는 삶이었다. 아이들에게 더 많이 해주고 싶은 마음이 고된 일도 견디게 해주었다. 월급날을 생각하며 가족의 미래를 그렸다. 막상 월급을 받자 자꾸만 마음이 붕 떴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리티미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대신 짐을 챙겨 떠났다. 세종시의 한 건설현장 근처 함바집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했다.
부부는 성격이 똑같다. 고집 세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 둘이 한 번 부딪치면 남는 건 상처뿐이었다. 리티미가 집을 나갈 때, 남편은 아내 이름으로 사준 땅을 도로 내놓으라고 했다. 리티미는 아르바이트로 모은 전 재산 600만 원을 남편에게 주고 맨몸으로 나왔다.
"나올 때 보니까 내가 여기 와서 6~7년 살면서 따로 챙겨놓은 돈이 한 푼도 없었던 거예요. 돈 없으면 못 사는 세상인데."
빈손으로 나왔지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목표의식이 뚜렷해졌다.
리티미도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들도 남편도 너무 보고 싶은데, 집으로 돌아가 예전 생활을 반복할 자신이 없었다. 며느리로서, 아내로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새 삶을 시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이제 겨우 스물여섯,
한국에서 대졸자들이 막 독립할 나이였다
별거 기간이 약이 됐다. 부대끼고 살 때보다 마찰이 줄었다. 그래도 통화를 하면 꼭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래서 두 사람은 문자를 주고받았다.
아침마다 안부를 묻다가도 며칠이 지나면 이혼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 리티미
남편은 리티미가 혼자 사는 원룸에 들렀다. 현관 비밀번호도, 리티미가 일하는 시간도 전부 알고 있었다.
"(당신) 집이야."
"남의 집에 허락도 안 받고 왜 와?"
"벌써 남이야?"
문자로 농담을 주고받다 보니 조금씩 마음이 풀렸다. 리티미도 일을 마치고 종종 보은군 집에 들렀다. 세종시에서 집까지 한 시간 거리를 달려왔다. 아이들과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새벽부터 도시락을 싸줬다. 그러고는 다시 세종시로 출근했다.
따로 산 지 몇 개월이 지나 겨울이 가까워진 어느 날 아침, 리티미는 출근 준비를 위해 화장실에 들어간 뒤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화장실에 그대로였다. 씻으러 들어온 건 분명했는데, 그 뒤로 기억이 안 났다. 어지럽고 무서운 와중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남편이었다.
그녀가 이 땅에 아는 사람이라곤
남편뿐이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약 타서 나오자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야?"
"병원에서 지금 나와서 약국 왔어."
"(당신)집에 왔어."
"왜 왔어?"
"당신 아프다며. 약 가지구 왔어."
집에 들어간 순간 아이들이 뛰쳐나왔다. 남편이 말한 약은 아이들이었다. "당신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거라고, 그래서 아이들 데려왔다"고 남편이 말했다.
"집에 가자, 우리 집에 가자."
이제 집에 가자
집도 식당도 금세 정리됐다. 보은으로 돌아왔지만 리티미는 자꾸만 흔들렸다. 남편은 베트남에 한 번 다녀오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가서 외할머니도 보고 동생들도 보고 오면 마음이 좀 낫지 않겠냐고. 리티미는 일주일 시간을 내 베트남에 다녀왔다.
"외할머니하고 외삼촌하고, 거기 가서 '뒤지게' 혼나고 왔어요. 나는 진짜 마음에 상처 많이 받고 갔었는데, 가족들이 그래요."
"티미야, 니가 그랬잖아. 니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그런데 니가 니 자식들한테 그러면 되겠어?"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베트남에 간 건지도 모른다. 자신을 낳아놓고 반쯤 내팽게친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 리티미는 자신이 엄마를 닮아 가고 있진 않을까 두렵다.
"동생들이랑 새아빠랑 같이 살면서, 아무리 잘해준다고 해도 내 새끼 아닌 이상 그게 안 된다는 걸 늘 느꼈거든요. 나 아니면 내 새끼가 눈칫밥 먹고 살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땐 그렇게 저만 생각했어요. 내 새끼들 가슴에 못을 박고."
일주일 동안 혼만 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게 한편으로 위로가 됐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뒤 리티미는 마음이 많이 안정됐다. 그때야 좀 철이 들었다고, 리티미는 회상한다.
2017년
스물아홉 리티미는 여느 워킹맘의 삶을 살고 있다. 아침저녁은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딸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 세종시 집을 정리하고 돌아온 그 겨울부터 하루에 여덟 시간, 옆 동네 금굴리에 있는 김치 공장에서 일을 한다.
리티미는 김치 완제품을 포장 용기에 분배하는 작업을 담당한다. ⓒ 김성인
리티미가 다니는 김치공장은 규모가 꽤 크다. 생산 라인에서 일하는 전체 65명 중 15명이 네팔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리티미를 포함해 3명이 결혼이주여성이다. 우리의 오랜 전통 음식이라 여겨지는 김치를 만드는 데 한국 땅 밖에서 온 사람들의 손맛이 1/3쯤 들어가는 것이다.
서른이 채 안 된 리티미는 두 아이의 엄마다. 아이들이 몇 년 전 얘기를 꺼낼 때가 가끔 있다. 아이들은 그때를 '엄마 없을 때'라고 한다.
"애들이 제 눈치를 많이 봐요. 애교도 엄청 부리고 자꾸 안기거든요. 제가 떠날까 봐 불안해서 그러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마음 아플 때도 많아요."
아이들 가슴에 두 번 못 박지 않기, 엄마처럼 살지 않기, 리티미는 매일 밤 자신에게 약속하고 또 약속한다.
-
2017. 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