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보은군의 아이들은 대부분 스물이면 고향을 떠난다. 보은군에는 초등학교 15개, 중학교 5개, 고등학교 4개가 있다. 대학교는 없다.
마스부치 마리코(56)가 보은에 정착한 지도 23년이 됐다. 마리코는 보은군에서 학교에 다닌 웬만한 아이보다 오래 보은에서 살았다. 그녀가 읍내에서 열린 어느 모임에 참여한 날, 한 남자가 말했다.
“니 친구 이제 올 거여. 친구 오면 같이 이야기 혀.”
마리코는 어리둥절했다. ‘저 아저씨가 내 친구를 어떻게 알지?’하고 생각하던 중 누군가 도착했다. 앳된 얼굴의 여자는 언뜻 봐도 한국인과는 생김새가 다른, 베트남에서 온 결혼이주여성이었다.
“베트남이랑 일본은 전혀 다른 나라거든요. 그런데 그 남자는 ‘다문화’ 한마디로 묶는 거예요. 한국인 아니면 전부 외국인, 그게 다문화인 거죠, 그 사람한테는.”
한국 사람에게
다문화는 곧 외국인이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인생 절반 가까이 보은군에서 산 마리코도 여전히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마음에 응어리가 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다문화가정이 만들어지는 형태는 시대에 따라 변했다. 2000년대 이후 국제결혼정보업체를 통해 동남아시아 여성들이 주로 국내로 들어온 것과 달리, 1990년대에는 통일교에서 주선한 국제결혼이 주를 이루었다. 일본 국적의 여성이 대다수였다. 현재 보은군에 거주하는 일본 출신 결혼이주여성들은 거의 이 시기에 시집온 경우다.
마리코는 1962년, 일본 이바라키현 사쿠라가와시에서 태어났다. 도쿄에서 북동쪽으로 차를 두 시간 달리면 나오는 사쿠라가와시는 지도상으로 보은군과 거의 같은 위도에 있다.
마리코가 성인이 되던 날, 할아버지가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들고 마리코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마리코
도쿄로 대학을 가 간호학을 공부한 그는 신주쿠에서 간호사로 7년간 근무했다. 1992년에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의료봉사를 다니던 중, 같은 교회에 다니던 친구의 소개로 지금의 한국인 남편을 만났다.
마리코는 1995년에 보은군으로 왔다. ‘다문화’라는 말도 없던 시절이었다. 동네 사람에게도 마리코 같은 여성은 마을에 처음 온 외국인이었다.
마을을 지키는 느티나무 바로 옆집이 마리코의 집이었다. 더위를 피해 정자에 둘러앉은 어르신들은 늘 “마리코~”하고 불렀다. “물 떠 와라”, “커피 타 와라”하는 잔심부름을 도맡으며 마리코는 한국살이에 적응해 갔다.
“처음 여기(보은군) 왔을 때 조금 놀랐어요. 부엌에 불 때서 하는 건 저 어릴 때도 못 봤거든요. 그래도 재밌었어요. 예쁨도 많이 받고. 처음에 시집 왔을 땐, 내가 일본 사람이라고 미워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어르신들이 다 잘해주시니까. 그때 아니었으면 아마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광복 이후 우리나라는 일본 대중문화 접촉 금지 정책을 썼다. 당시엔 일본의 영화, 음악, 방송, 애니메이션 등을 국내에 수입하고 소비할 수 없었다.
길에서 일본어를 쓰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일본에서 온 새댁들이 몇 없기도 했지만, 몇 안 되는 친구들을 맘 놓고 만날 상황도 안 됐다.
결혼하고 몇 년 지나 비디오 가게에 들렀을 때다. 마리코가 일본인인 것을 안 가게 주인이 말했다.
“친정 다녀올 때 영화나 드라마 테이프 좀 구해다 줘.”
일본의 최신 문화는 국내에서도 유행이었다.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소비를 막을 길은 없었다.
일본 대중문화는 광복 이후 오랫동안 국내에서 소비와 유통이 금지됐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을 시작으로 단계별 개방 정책이 시행됐다. 출처: 박조원, 현무암, "일본 대중문화 전면 개방의 영향 및 파급 효과 예측",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2005, p.11
비슷한 시기에 보은군의 한 김치 공장에서 일본 수출을 담당하는 직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마리코는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일본 사람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일 간 소통을 담당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김치공장에서의 수업을 시작으로 보은군 내 초중고에서 일본어 강사로 일했다. 일본에서 보은군으로 손님들이 방문할 때 통역할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달려갔다.
마리코는 보은군 관내 초 중 고에서 20년 가까이 일본어를 가르쳐 왔다. 일본에 다녀올 때마다 일본 문화와 관련된 수업 자료를 가져오느라 집에 보따리가 한가득 있다. ⓒ김성인
한국인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경력이 20년이지만, 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절대 안 물어봐요. 문 꼭 닫고 엄마 들어오지 말라고. 옆에서 발음 틀린 것 알려주면, ‘흥!’하고 방에 들어가서 혼자 엄청 연습해요.”
중학교 3학년인 그녀의 딸 정희는 일본어를 아주 잘한다. 지난해엔 충청북도에서 열린 이중언어 말하기대회에서 금상을 탔다. 이번 주말엔 전국 단위 대회에 참가한다.
대부분의 다문화 자녀들이 엄마의 모국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과 달리 정희는 이중언어사용자다. 마리코는 결혼 이후에도 1년에 한 번씩 친정에 가서 한 달씩 머물고 돌아왔다.
외가 친척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정희도 일본어를 자연스럽게 쓰게 됐다. 지난 겨울엔 마리코가 나온 고향의 중학교에서 정희도 2주 동안 공부했다. 정희는 대학을 일본으로 가고 싶어 한다.
딸과 달리 마리코는 남편에게 직접 배운 게 많다. 학교 행정실 직원으로 근무하다 정년퇴직한 남편은 전통예술인으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다.
남편은 마리코와 같은 일본인 이주여성들에게 풍물놀이를 가르쳐 주었다. 마리코와 동료들은 지역 축제 때 참가할 만큼 오랜 취미이자 문화활동으로 풍물놀이를 즐긴다.
마리코의 남편 구본명(64)이 일본에서 온 결혼이주여성들에게 풍물놀이를 가르치고 있다. ⓒ김성인
보은군이 작은 지구촌이라고는 하지만, 다양한 나라에서 온 이들이 늘 함께 어울리지는 않는다. 나라별로 모이는 게 보통이다.
“필리핀에서 온 언니들도 취재하고 있는데, 그쪽도 한창 아로니아 수확 철이더라고요. 낮에는 아로니아 따고 저녁엔 다문화 댄스대회 나간다고 춤 연습하고요.”
“아 그래요? 거긴 또 거기끼리 모이는구나. 우리는 우리끼리! 일본팀, 필리핀팀 그렇네~.”
우리는 일본팀,
그쪽은 필리핀팀
이마이 히로코(53)의 아로니아 농장에서 마리코와 무라야마 히토미(58)가 아로니아를 수확하고 있다. ⓒ김성인
8월 중순, 보은군에서는 아로니아 수확이 한창이다. 읍내에서 아로니아를 키우는 이마이 히로코(53)의 농장에 ‘일본팀’이 모였다.
이날 일본팀의 선수들은 이마이 히로코, 무라야마 히토미(58), 마스부치 마리코, 그리고 히로코의 아들 김준식(26)이었다. 1990년대 초에 결혼한 이주여성들의 자녀들은 벌써 성인이 됐다.
한국인 아빠와 일본인 엄마 밑에서 자란 학창시절이 어땠는지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저는 그냥 다 말하고 다녔어요, 엄마가 일본인이라고. 그러니까 애들이 말도 조심히 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더라고요. 그런데 또 제 동생은 달라요. 아주 친한 사이 아니면 굳이 말하지 않더라고요.”
옆에서 듣고 있던 히토미도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아들 이름이 준석이거든요 나준석. 일본식 이름도 준이에요, 같은 한자를 써서. 그런데 친구들이 ‘준짱’이라고 불러요. 별명처럼. 그게 오히려 자연스럽고 친근하더라고요.”
엄마가 일본인이라서 혹시나 아들딸이 놀림 받지는 않을까, 걱정도 많았다. 아이들 사이에선 그런 일이 없었다. 그런데 딱 한 번, 엄마만 기억하는 일이 있다.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선생님이 애를 불러서 “정희야, 독도가 한국 땅이니, 일본 땅이니?”하고 묻는 거예요. 제가 보는 자리에서요. 여덟 살 애가 뭘 알겠어요. 저는 마음 속으로 진짜 걱정 많이 했어요. 우리 애기가 어떤 대답을 할까, 잘해야 할텐데, 하고.”
마리코는 당시 딸이 다니는 학교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고 있었다. 딸은 무리 없이 잘 대답했다. 마리코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TV를 보다가 별안간에 상처받은 일도 있다. 밥그릇을 들고 먹는 아이에게 엄마가 “왜 밥그릇을 들고 먹어? 일본 사람이야?”하고 혼쭐을 냈다. TV 속 엄마의 말엔 ‘일본인처럼 하면 안 된다’는 뜻이 있었다.
한일 간 깊은 역사적 골을 잘 알고 있지만, 일본이 아닌 ‘일본 사람’에 대한 비난을 들을 때면 마리코는 가슴이 아프다.
일본인처럼 하면 안 돼!
마리코는 한국으로 귀화하지 않고 영주권을 받아서 살고 있다. 따라서 이름도 일본에서 쓰던 ‘마스부치 마리코(ますぶち まりこ)’를 그대로 쓰고 있다. 발음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이름 때문에 곤란했던 적도 많다.
일본어의 한글 표기법에 따르면 ‘마스부치 마리코’가 옳은 표기다. 한국에서 23년 살면서 받은 상장과 수료증에는 마리코의 이름이 제각각 다르게 표기돼 있다.
‘마쓰부찌 마리꼬’, ‘마스부찌 마리꼬’, 심지어 성을 빼먹은 ‘마리꼬’까지. 성과 이름을 분리하는 것도 모자라 병원 전광판 같은 데는 ‘마스부찌마’하는 식으로 이름이 잘려서 표기될 때도 있다.
마리코가 받은 상장과 수료증에는 마리코의 이름이 제각각 다르게 표기돼 있다. ‘마쓰부찌 마리꼬’, ‘마스부찌 마리꼬’, ‘마리꼬’. 마리코의 이름을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면 ‘마스부치 마리코’다. ⓒ김성인
마쓰부찌도 마스부찌도 아닌
'마스부치'
수년 전 마리코가 다리를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 이름 때문에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을 뻔한 적도 있었다. 남편이 ‘마리코’를 한자로 쓴 ‘真理子’를 한국식으로 읽어서 마리코를 ‘진리자’라는 이름으로 보험에 올린 것이다. 여러 서류를 동원해 본인임을 증명한 후에야 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었다.
“내 이름이 몇 개인지도 몰라요. 아주 골치 아파요.”
이후 마리코는 중요한 서류를 낼 일이 있으면 두 번 세 번 확인한다.
마리코가 보은에서 산 세월을 떠올리고 있다. ⓒ김성인
한국인 아빠와 일본인 엄마, 혹은 한국인 엄마와 일본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한일 이중국적을 지닌다. 한국에서는 이들이 성인이 돼도 이중국적이 인정되지만, 일본국적법상 만22세가 되기 전에 어느 한쪽의 국적을 선택해야 한다.
마리코의 딸 정희도 몇 년 후엔 국적을 선택할 날이 온다.
딸은 자신의 국적도, 앞으로 살아갈 나라도 스스로 선택할 것이다. 정희에겐 마스부치 시즈키라는 일본 이름도 있다. ‘정희’로 살든 ‘시즈키’로 살든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시대가 진짜 다문화 사회일 거라고 마리코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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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