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둘째 주, 넷째 주 목요일, 충북 보은군 회남면 조곡리에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양복을 멀끔히 차려입고 메신저 백을 맨, 짙은 눈썹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그를사람들은 ‘은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신 짜오, 신 짜오.”
작은 시골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베트남어 인사가 손님을 맞는다. 은 선생님은 한 달에 두 번 회남면의 한 교회를 방문하는 목사다. 회남면에 사는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들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마다치 않는 그 역시 베트남 사람이다.
안산에서 보은까지,
왕복 300km
보은군과의 인연이 시작된 건 지난해 4월이다. 회남교회 김영수 목사가 은 선생님이 속한 안산의 교회에 요청했다. 보은군에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이 많으니 베트남인 종교인을 보내줄 수 있느냐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격주 목요일마다 은 선생님이 보은에 내려오게 됐다. 오전 아홉 시, 안산터미널에서 청주행 버스에 올라 청주 가경터미널에서 내리면 열한 시가 좀 안 된다. 터미널 밖엔 회남면에서 차를 끌고 온 목사가 기다리고 있다. 두 사람을 실은 차가 굽이굽이 고개를 넘어 회남면에 도착하면 벌써 점심시간이다.
격주 목요일 점심께 은 선생님이 회남교회에 도착하면, 일단 점심부터 먹는다. 베트남 음식이 차려질 때가 많지만, 간혹 한국식으로 먹기도 한다. ⓒ 누엔 티 홍뇽
한국의 시골을 지키는
베트남 여성들을 만나다
보은군 회남면은 산골짜기 사이로 대청호가 있는, 군내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다. 세계화의 파도는 결혼이주여성을 바다 너머로 반나절 만에 데려다줬고, 다시 가장 보이지 않는 골짜기로 몰아넣었다.
2006년 김영수 목사가 처음 보은에 내려왔을 때, 그는 아직 지역 사정에 밝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집집마다 방문하고 나서야 이 지역에 외국에서 온 결혼이주여성들이 꽤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2000년대 초반부터 보은군의 국제결혼 비율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동네에 한두 명씩 있던 여성들은 거의 집 안에만 머물렀다. 말이 안 통해 혼자서는 어디 나가기도 어려웠을뿐더러, 말이 통한다 해도 교통편이 워낙 좋지 않았다.
결혼이주여성들은 외로워했다. 남편들은 알음알음 아내와 동향 출신인 이주여성들을 아내에게 소개해 줬다. 결혼 이전에 살던 모국어로 잠깐이나마 수다를 떨면 아내의 표정은 한결 나아졌다.
결혼이주여성을 위한 커뮤니티
김영수 목사는 결혼이주여성이 모일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011년 즈음부터 결혼이주여성들에게 교회에 한번 나오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들이 교회에 잘 나온 건 아니다.
“그때는 목사님이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고, 또 (개신교를) 안 믿으니까 잘 안 갔어요.”
2009년에 베트남에서 회남면으로 시집온 레 티 참(29) 씨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말도 못 알아들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기독교인이 아닌데 교회를 가는 것부터가 내키지 않았다.
베트남은 토속 신앙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다. 집이나 가게, 길거리 곳곳에서 신줏단지를 모시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 나라다. 2014년 조사에 따르면 베트남 전체 인구의 약 73%가 토속 신앙을 믿거나 종교가 없다. 그 뒤를 불교 신자(12%), 가톨릭 신자(7%), 까오다이교 신자(5%)가 따른다. 개신교를 믿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1.5%에 불과하다.
김영수 목사는 베트남에서 충북 보은군으로 이주한 여성들을 위한 시간을 따로 만들었다. 교회에서는 동네 어르신들 눈치 볼 필요 없이, 마음껏 베트남어를 쓸 수도 있도록 배려했다.
그 시간은
우리의 시간이에요
“베트남 사람들만 모이니까,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마음이 편해지는 거예요. 목사님이랑 사모님은 말 안 통해도 편하게 해줘요. 설명도 잘 해주고.”
어느새 회남면에 사는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 대부분이 교회에 나오게 됐다. 따로 모임을 열 필요도 없이 매주 목요일에 교회에서 만난다.
같이 밥 먹는 식구가 되니 서로의 이런저런 사정이 눈에 보였다. 어린 자녀들을 둔 결혼이주여성들에겐 한국어가 가장 어려운 숙제였다. 외국인 엄마를 둔 아이들은 말이 느리고 내성적이라는 주변의 걱정에 아이들은 더 움츠러들기도 했다.
김영수 목사는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교육을 힘닿는 만큼 도와주고자 했다. 베트남의 문화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한국에서 살아갈 날이 훨씬 더 많은 이들이다.
“우리 교회 오면 한국어 공부하고 컴퓨터도 배웠어요. 목사님이 한글 문서 만드는 것 알려주고요.”
이들의 사회생활은 교회에서 시작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집과 논밭, 혹은 공장만 오가던 이들은 다양한 활동을 시작했다. 보은군에서 열리는 대추축제에도 참가하고 아이들 학교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들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 오르자 지역사회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결혼이주여성들을 위한 일자리 사업이 추진됐다. 회남면에 거주하는 누엔 티 홍뇽(33) 씨와 레 티 참(29) 씨는 올해부터 회남면 어부동지역아동센터에서 베트남 문화 교육 강사로 일하고 있다.
2010년에 결혼한 누엔 티 홍뇽 씨(왼쪽)와 2009년에 결혼한 레 티 참 씨(오른쪽). 두 사람은 충북 보은군 회남면의 한 마을 윗말 아랫말에 각각 살고 있다. ⓒ 김성인
갓 초등학교 들어간 어린아이들에게 왜 영어도 아닌 베트남어를 가르치느냐 싶겠지만, 지역 사정을 보면 생각이 바뀐다. 어부동지역아동센터에 다니는 유치원생 12명, 초등학생 14명 총 26명의 아이 중 16명이 다문화가정 아이들이다. 그중 14명 아이의 어머니가 베트남 출신이다.
레 티 참 씨가 회남면 어부동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베트남 전통 놀이를 가르쳐주고 있다. ⓒ 김성인
아이들이 너무 어린 탓에 베트남어를 가르치기는 쉽지 않다. 누엔 티 홍뇽씨와 레 티 참씨는 아이들에게 베트남 문화가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젓가락과 고무공을 이용한 베트남 전통놀이를 가르치고 함께 놀다 보면 한 시간이 금세 지나간다.
교회에 나가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바빠질 줄만 알았는데 오히려 여유가 생겼다. 모임에서는 일 년에 한두 번 소풍을 떠난다. 엄마들끼리 서울 가서 한강도 구경하고, 영덕에 가서 대게도 먹는다. 아이들 데리고 로봇박물관에 다녀오기도 했다. 목사님이 운전하는 작은 버스를 타고 당일치기로 다녀온다.
그러다 지난해부터 은 선생님이 격주로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수년 간 우정을 쌓은 김영수 목사였지만, 아무래도 깊은 이야기를 하기엔 언어적 장벽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은 선생님의 본명은 응우옌 반 호앙 꾸옥 안(Nguyên Van Hoang Quôc An)이다. 한국에 오고 나서 그의 긴 이름은 딱 한 글자로 대체됐다. 한자 ‘은혜 은(恩)’자를 써서 ‘은 선생님’,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들에게도 그는 ‘은 선생님’이다.
넉넉지 않은 집안 살림에도 대학에 진학한 그는 1999년, 새로운 밀레니엄의 목전에서 바람 앞 촛불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일본어에서 한국어, 다시 영어로 전공을 두 번이나 변경하면서까지 진로를 탐색하던 그에게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고향에 홍수가 크게 나서 수확을 목전에 둔 벼가 전부 강물에 잠긴 것이다. 단지 한해 농사 망친 걸로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파산했고, 은 선생님은 대학을 더는 다닐 수 없었다.
“당시엔 제게 돈도, 직장도, 희망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게 현실이었고요.”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한 한국인 사업가를 만났다. 은 선생님은 현지 코디 일을 봐주며 다시 학업을 시작했다. 신학 전공으로 학사를 수료하고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한 그는 2013년, 한국으로 유학을 왔다.
왜 한국을 선택했느냐고 묻자 다소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한국 드라마를 정말 좋아했거든요. <겨울 연가>랑 <천국의 계단>이 아직도 기억나요. 그 드라마들 보면서 한국에 관심을 가진 것 같아요.”
은 선생님이 한국에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 김성인
한국과의 인연은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시작됐다
진담 반 농담 반이었지만 드라마에서 시작된 한국과의 인연은 그의 20대 내내 이어졌다. 한국인 사업가를 만나고 그를 통해 한국인 친구들도 여럿 사귀었다. 막연히 한국행을 꿈꾼 지 10년이 지나, 은 선생님은 한국 땅에 도착했다.
베트남을 떠난 이유는 또 있다. 베트남 전체 인구 중 개신교를 믿는 사람은 단 1.5%, 은 선생님은 바로 그 1.5% 중 한 명이었다.
공식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여러 번 천명됐지만, 베트남에서 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종교 활동은 베트남 공산당의 지침 아래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가 유학을 선택한 이유다.
그는 현재 경기도 안산시 다문화거리 근처 한 교회의 목사로 일한다. 이 교회에서는 일요일마다 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중국, 네팔, 태국, 캄보디아, 파키스탄, 필리핀, 우즈베키스탄, 미얀마, 몽골, 러시아 총 12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각각 모여 예배를 올린다. 외국인과 다문화를 위한 시간이다.
안산과 보은의
거리를 좁히는 일
같은 한국이라도 안산과 보은에서 이주민들이 사는 모습은 매우 다르다. 젊은 시절 즐겨 보던 한국 드라마 속의 한국 모습과 현실도 다르다. 농촌으로 시집온 외국인 여성의 삶은 드라마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결혼이주여성들 사이에서도 나타나는 도농격차, 은 선생님은 그 차이를 좁히는 것도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꼬박꼬박 보은군을 찾는 이유다.
“한국인 남편과 스무 살 차이나는 결혼이주여성도 있어요. 그래서 부부 사이에 문화적 차이뿐만 아니라 세대 차이도 나는 거예요.”
동향 출신 목사로서, 은 선생님은 베트남에서 온 이주여성들이 한국에서 꾸린 가정에 충실하고 잘 정착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아내와 남편을 만나 서로 이해하고 관계를 개선하도록 상담하는 게 그의 일이다.
보은군과 안산시에서 베트남 출신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하는 걸 안 좋게 보는 시선도 있다. 외국인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소외를 느끼는 것처럼, 한국인들도 한국에서 외국인들끼리 모여서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면 이상하게 보기도 한다.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들은 대개 20대 초반이에요. 베트남에서 오는 남성 노동자의 나이도 비슷해요. 이들이 서로 어울리다 보면 애정 문제가 생기는 사례도 있어요. 한국인 남편이 가장 걱정하는 점이 그 부분이에요. 제가 가장 신경 쓰는 점이기도 하구요.”
김목사님은 아빠고,
은 선생님은 오빠 같아요
응우옌 반 호앙 꾸옥 안(38, 오른쪽)이 보은군에 사는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들과 대화하고 있다. ⓒ 김성인
말이 통하는 사람이 오니 모임의 결속력은 더 단단해졌다. 가정에서 종종 겪는 남편, 시어머니와의 갈등, 일상에서 마주치는 황당한 일들을 성토(?)하다 보면 하루가 훅 지나간다. 은 선생님은 한 명 한 명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상담해 주기도 한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안산 집에 도착하면 시계는 벌써 밤 9시를 가리킨다. 몸은 피곤하지만 웬만해서는 이 만남을 거르지 않는다.
안산과 보은의 거리를 좁히는 일, 그 책임감이 은 선생님이 고된 여정을 마다치 않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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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