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m Ji Youn Mar 22. 2021

적당히 준비할 수 있는 혜안

준비의 정도

필리핀 선생님과의 화상 영어 시간.

미리 시청해 둔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지만, 이런저런 농담까지 섞어가며 화기애애하게 영어로 이야기하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 자식인데도 부러운 마음이 마구 뿜어져 나온다.


어학연수는 커녕 TOEIC 고득점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내 입장에서, 영어로 글을 쓰고 영어로 말을 하기 위해서는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문법 체크 시간이 반복되곤 했다. 대화의 틈에 끼어드는 잠깐의 침묵이 거슬렸다. 아이만큼은 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미리 ‘준비’를 시켜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를 낳고 YL(Young Leaders) TESOL 자격증을 땄고, 영어 유치원을 보냈다. 


감사하게도 재미있는 추억을 많이 만들었던 유치원 생활을 뒤로한 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개인적으로 이만큼의 소위 ‘아웃풋’을 갖게 된 것은 큰 만족이었다. 이렇게 책 읽고, 만화 보고, 이야기할 수 있음 되겠구나. 어느 정도 미리 ‘준비’를 했으니 앞으로 이렇게 나아가면 되겠구나. 


그런데 사실, 이런 기대는 초등학교 입학 전인 작년 말부터 조금씩 금이 가고 있기는 했다. ‘이 정도면 잘한다’는 생각에 아무 ‘준비’ 없이, 그 힘들다던 대치동 유명 학원 테스트 신청에 성공하여 아이를 데리고 갔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온 아이에게 “와~ 테스트를 끝마치고 나오다니, 대단하다~”라고 말하며 안아주자, 아이는 그제야 웃으면서 조잘조잘 대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 그 학원에서 ‘불합격’ 문자를 받았다. 아이에게는 입도 뻥긋 안 했지만, 우리 부부는 그날 밤 회 한 접시에 소주를 마셨다. 대치동 학원에 테스트를 볼 생각이 있었다면 집에서 따로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그 ‘준비’를 하지도 않고 괜히 애만 고생시켰다는 생각에 미안해졌다. 


학교에 입학해서도 이 ‘준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국어도 수학도 심지어 과학도 미리미리 준비하는 친구들이 많다. 사교육에 대한 기준과 이유, 아이가 즐겁게 잘 따라가는지의 여부 등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교육을 갖고 비난할 수도 없고 비난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어디까지가 ‘준비’가 될 수 있을지가 궁금해졌을 뿐이다.




‘준비’는 미리 대비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준비’는 계획했던 일들을 수월하게 도와준다. 준비된 내용과 현실의 상황이 만나 시너지를 이루면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기도 한다. 준비된 사람이 원하는 것을 갖는다는 류의 명언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은 이유도 분명 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의도와는 다르게 일이 전개될 경우에는, 충분히 준비하지 않아서 혹은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라는 이유로 자책하게 된다.


어린 시절, 나는 ‘준비’라는 단어가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준비’가 된 사람들은 늘 기회를 잡았다. 그런데 기회를 잡았던 준비된 사람들은 항상 나에게 너무 큰 존재로만 다가왔다. 그만큼 준비가 되지 않고서는, 기회가 가까이 다가왔다 하더라도 섣불리 잡았다가는 오히려 실망하고 고생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무언가를 시도해 볼 엄두를 내기까지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리곤 했다. 준비된 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회를 피하고 뒤로 내빼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옆을 돌아봤을 때, 나보다 준비가 덜 되어 보이는 사람이 기회를 잡고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준비도 중요하지만, 준비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용기가 아닐까.


용기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준비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기회를 잡을 수 있으려면 ‘이 정도면 시도해볼 만하지 않을까? 혹시 실패한다 하더라도 이겨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오랜 준비 끝에 출중한 실력을 갖췄다 한 들, 이 질문에 용기를 낼 수 없다면 기회는 나를 벗어나기 마련이다.




얼마큼의 준비가 자신감을 줄 수 있을까?

지나치게 오래된 준비가 오히려 자신감과는 반대되는 나태함으로 연결될 수도 있지는 않을까?

준비만 하다가 지쳐 쓰러지지는 않을까?


적당히 준비할 수 있는 그리고 적당히 준비시킬 수 있는 혜안을 가졌으면 좋겠다.

준비의 긍정적인 면만 고스란히 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사진 출처: unsplash.com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을 만드는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