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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월 Aug 15. 2019

경계에서 꾸는 꿈

영화 <겨울꿈> 리뷰


그는 이제 더 잃어버릴 것이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상처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 스콧 피츠제럴드, 『겨울꿈』




바람 소리를 듣고 깼는데 깨어보니 여름이었다. 정미는 땀을 흘리는 남자를 보며 몇 차례 뭔가 써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제자가 찾아와 인사를 하는데 정미는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제자는 책을 냈다고 말하고 정미는 책을 내지 못했다. 빈 교무실에서 정미는 겨울을 느낀다. 


계절의 경계

블랙아웃 화면에서 겨울의 바람 소리가 들렸는데 곧 이어진 화면에서는 매미 소리가 들린다. 땀을 흘리며 자고 있는 정미. 정미는 꾸고 있던 꿈에 대해 아주 추운 겨울인데 갈증이 계속 나서 물을 한참 마시다가 이번에는 땀이 나서 흠뻑 젖어버리는 꿈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눈을 뜬 정미는 땀이 뚝뚝 떨어지는 여름에 있다. 여름에 겨울을 생각하듯이, 현실 속 정미는 계속해서 꿈을 떠올린다. 


꿈과 꿈

꿈에서 본 듯한 땀을 흘리는 사람을 보고 몇 자 적어보려고 하지만 적을 수 없다. 넘치는 물을 보고도 시상이 떠오르는 듯 하다가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정미는 꿈에 몰두하며 꿈을 생각한다. 오래 전부터 꾸어온 작가라는 꿈과 지난밤 꾼 겨울을 떠올리는 꿈. 하지만 어제 꾼 꿈도, 꿈꿔온 작가도 정미에게는 쉬이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오랜만에 만난 제자는 나를 닮고 싶‘었’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나보다 먼저 책을 냈고 종일 잔상이 남았던 어젯밤의 꿈은 선배 교사에게 강제로 팔게 된다. 영화에 초반부 인용되는 ‘겨울꿈’의 문장처럼 정미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 보인다. 잃어버릴 것이 없어진다면 더 이상 받을 상처도 없다는 건, 사실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감각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닐까. 꿈조차 팔아버린 정미는 멍하니 교무실에 눕는다. 


경계에서 꾸는 꿈

영화는 현실과 타협하며 살면서도 꿈을 계속 잡고 있는 정미를 지난밤의 꿈을 계속 상기하는 정미의 오늘과 교차하여 보여준다. 지난밤의 꿈이 작가라는 꿈에 대한 은유라면 그 꿈을 억지로 팔게 된 정미에게는 이제 꿈조차 남지 않았을까. 그런데 지친 상태로 잠시 잠이 든 그녀에게 다시 바람 소리가 들린다. 눈을 뜬 정미는 온도 차이로 컵 면에 맺힌 물방울과 흔들리는 교무실의 창문을, 그리고 세찬 바람 소리를 듣는다. 손을 데어 본 입에서 입김이 나온다. 그녀는 연기처럼 피어 올라가는 자신의 더운 숨을 본다. 지난밤의 겨울꿈은 아직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제자 소정은 정미에게 그녀가 예전에 했던 ‘작가란 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사는 거다’는 말을 들려준다. 어쩌면 ‘되는 일’에 조급해 이미 그렇게 살고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던 것 아닐까.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면서 매일 시상을 찾고 또 쓰는 그녀는 이미 작가였는데. 정미의 말에서 '작가'를 '꿈'으로 치환해본다. '꿈이란 이루는 게 아니라 품고 사는거다'. 어느 순간 반짝 하고 빛나는 게 아니라 삶을 그것과 일치시키며 빛을 담는 게 꿈이라면 삶과 꿈은 떨어져있지 않을테다.


현실과 꿈, 눈 뜬 이 곳과 눈 감은 저 곳의 경계에서 정미는 다시 꿈을 꾼다. 꿈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아도 된다. 내뱉는 숨이 보인다. 꿈도 나도 아직,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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