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기산 백패킹
지난해 봄부터 시작했으니 백패킹을 시작한 지도 약 1년 정도가 지났다. 처음 시작 한해에는 밖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잔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도전이었기에 동계 백패킹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른 건 몰라도 한겨울 추위만큼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에 동계 시즌은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백패킹을 다니면서 많은 산과 바다, 백패킹의 성지라는 몇몇 장소에도 다녀왔지만 아직 해소되지 않은 하나의 로망이 남아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동계 백패킹, 그중에서도 설원 위에서의 백패킹이었다. 이번 겨울에는 그 로망을 꼭 실현하고자 우모복, 스패츠, 아이젠 등 겨울에 필요한 장비를 하나씩 사 모으면서 출정의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은 점점 더 깊어 갔지만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지독한 한파로 한참을 날씨만 확인하면서 지내다가
한파가 풀린다는 일기예보를 접하고 드디어 출동 날짜를 잡았다.
첫 동계 백패킹이다 보니 이런저런 걱정이 앞섰다. 짐도 많고 날씨까지 오락 가락 해서 접근성이 좋으면서
눈꽃까지 볼 수 있는 곳을 고르다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곳은 강원도 횡성의 태기산이다.
출발 당일 태기산 백패킹을 함께할 멤버들과 모여서 장을 보고 횡성으로 출발했다. 날씨가 많이 풀려서 추위에 대한 걱정은 덜었지만 최근 한 달 동안 제대로 된 눈 소식이 없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설산 백패킹인데 눈이 없으면 어떡하지?
광주와 원주를 지나서 점점 영동지방으로 향해 갈수록 산 위에 있는 눈이 점점 눈에 띄었다.
"오 좋았어 산 위에는 눈이 많이 있겠다!"
"강원도 산속은 항상 눈이 쌓여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돼"
태기산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는 각자의 기대와 걱정이 오가는 대화가 이어졌다. 들머리인 양두 구미재에 차를 주차하고 문을 여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면서 내일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우리는 출발 전 빠트린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고 정상으로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태기산 초입에는 녹아내린 눈과 흙이 뒤섞여서 진흙탕이 되어 있었다. 생각했던 그림과는 달랐지만 점점 개이는 하늘과 힘차게 돌아가는 풍력 발전기를 보면서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해길 무렵에 비박지에 도착했기 때문에 빠르게 쉘터와 텐트를 설치했다. 바닥은 울퉁불퉁하고 심한 냉기가 올라왔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모든 게 용서가 됐다.
쉘터 정리를 마치고 저녁과 함께 반주를 하며 설원 위의 첫날밤을 준비했다.
"일기 예보를 보니 내일 아침에 눈이 조금 올 수도 있겠는데?"
"그럼 너무 좋겠을 것 같다!"
이른 아침 텐트를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눈이 오는 건가?"
작은 소망은 이루어졌다. 사방에 뿌려지는 눈 때문에 숲 속은 더욱 하얗게 변해 있었다. 아침부터 내린 눈과 상고대가 더해져 눈꽃을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해주었다.
우와 너무 멋지다, 너무 좋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셔터를 눌렀다. 매주 백패킹을 다닐 수 없는 나로서는 1년에 한두 번 만날 수 있을까 말까 하는 풍경이었다.
"아침은 안 먹더라도 눈 내리는 숲 속에서 커피를 한잔 안마실수 없지"
잠시 후면 철수해야 할걸 알기에 커피를 마시며 잠깐이라도 이 낭만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다. 이런 곳에서 마시는 커피는 어떤 것이라도 맛이 없을 수가 없다.
한 겨울에 밖에 나가서 자면 미쳤다고 하는 지인들이 많이 있지만 괜찮은 장비만 있으면 영하 10도 정도는 춥지 않게 보낼 수가 있다. 덕분에 장비병만 점점 더 심해지는 요즘이다.
돌아올 때까지 물은 500ml밖에 마시지 않았다. 백패킹의 꽃은 동계 캠핑이라는 말을 이번 경험을 통해 절실히 깨달았다. 적당한 추위는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되고 벌레도 없는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준다.
이젠 아쉬움을 뒤로하고 철수를 해야 될 시간이다. 이런 경험은 이제 다음 겨울이 되어야 다시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더욱 아쉬움이 남았다.
떠나기 전 남아있는 쓰레기는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을 한다. 유명한 백패킹 장소에 가면 쓰레기가 쌓여 있는 것을 쉽지 않게 목격할 수가 있다. 양심 없는 사람들 때문에 백패커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는 현실을 보면 씁쓸해진다.
양구 두미재로 돌아가는 길에는 계속해서 약한 눈이 내린다. 흩날리는 눈과 안개가 돌아가는 아쉬움을 달래주는 듯 하얀 상고대를 선물해 주었다.
LNT : Leave no t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