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왕국으로 가자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뭐야?"
"글쎄..."
"제일 싫어하는 계절은?"
"겨울!"
좋아하는 계절에 대한 대답은 망설였지만 싫어하는 계절에 대한 대답은 한 번에 할 수 있었다. 한여름 더위는 참을 수 있었지만 살을 베는 듯한 칼바람과 추위는 점점 더 견디기가 힘들다.
대답을 조금 망설이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한라산에서 난생처음 설경과 눈꽃을 본 뒤로는 점점 더 겨울을 기다리게 된다. 매년 봄이면 벚꽃을 보러 가는 것처럼 겨울이 되면 눈꽃을 보러 가는 것이 어느새인가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이번 눈꽃 트레킹은 작년 이맘때부터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덕유산이다. 며칠 동안 내린 폭설과 30년 만의 최강 한파로 인해서 눈꽃이 만발해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안고 무주로 출발했다.
덕유산 리조트 주차장에 도착했다. 미세먼지 하나 없는 맑은 날씨에 산머리에 하얗게 눈이 내려앉은 모습이다. 기온이 많이 떨어져 있기 하지만 눈꽃을 보기에는 최고의 날씨다.
덕유산은 매년 겨울이면 눈꽃 명소로 손꼽히는 곳이다. 해발 1614m로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을 곤돌라를 타고 편안하게 올라갈 수가 있다. 트레킹을 즐겨하지 않는 사람들도 곤돌라 정상 도착점인 설천봉까지 단숨에 오를 수 있어서 겨울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덕유산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곤돌라를 타고 10여분 정도 올라왔을 때쯤 드디어 눈꽃의 만개한 덕유산과 마주 했다. 파란 하늘과 맞닿아 있어서 더욱 눈부시다. 곤돌라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감상하다 보니 순식간에 설천봉에 도착했다.
향적봉으로 올라가는 길에 내려다본 설천봉 휴게소의 모습. 덕유산 설경을 떠올렸을 때 제일 유명한 사진이 아닐까 싶다.
설천봉에서 언덕길을 따라 덕유산 정산 향적봉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며칠 동안의 폭설과 한파로 인해서 나뭇가지에 눈꽃이 만발했다. 300~500년생 주목들에서 피어난 눈꽃 터널이 장관을 이룬다.
발걸음을 떼는 곳 하나하나가 그림이 되는 곳. 눈꽃과 수묵화처럼 펼쳐진 산그리메까지 함께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설천봉에서 걸어서 20여 분 만에 덕유산 정상 향적봉에 도착했다. 정상석 근처에 인증숏을 남기려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설천봉에서 걸어올 때는 눈꽃에 정신이 팔려서 추운 줄 몰랐는데 능선길에 오르니 칼바람리 매섭게 불어온다.
향정복에서 우측 길을 따라가다 보면 향적봉 대피소가 나온다. 매점에서 간식도 판매하고 취사장에서 음식을 해 먹을 수도 있다. 아직 해 떨어지기 전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서 중봉까지 다녀온 뒤에 휴식을 하기로 했다.
한 겨울에도 꽃이 필 수 있다
설천봉 대피소를 지나서 중봉으로 향한다.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가 말도 안 되는 풍경에 이어진다. 몇 년 동안 눈꽃 트레킹을 해왔지만 이번 덕유산 설경이 단연 최고다. 폭설과 한파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이다. 도심에서는 폭설이 교통체증과 사고를 유발하겠지만 트레커에게 겨울산의 폭설은 축복이다.
덕유산의 진면목을 보려면 향적봉을 지나서 중봉까지는 꼭 걸어보라고 하고 싶다. 산행객을 반기는 주목과 구상나무가 장관이다.
폭설이 내린 뒤의 덕유산은 산 전체가 하얗게 얼어붙어어서 마치 겨울왕국에 온 것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얗게 눈이 쌓인 나무는 크리스마스트리로도 손색에 없을 것 같다. 불과 한 달 뒤면 하얗게 내린 눈을 모두 걷어내고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 난다는 것이 지금으로써는 상상이 되질 않는다.
덕유산 중봉에 도착했다. 온몸을 감싸던 눈꽃 터널을 지나 탁 트인 중봉 정상에 올라섰더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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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에 올라 서면 한반도의 뼈대인 백두대간과 마주한다. 육십령부터 구천동까지 30km를 걷는 이른바 육 구종 주를 하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서 걷는 이들 뒤로 산그리메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해 질 녘이 되어서 향적봉 대피소로 돌아간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많은 눈꽃을 보는 게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반가운 향적봉 대피소에 다시 도착했다. 이번 산행에서는 향적봉, 중봉, 백련사까지 여유 있게 돌아보고자 대피소를 예약했다. 해가 지기 1시간 전쯤 대피소에 들어왔는데 이미 많은 산행객들에 대피소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잠자리가 예민한 편이라 원하는 자리를 잡으려고 대피소 담당자와 약간의 실랑이를 거쳐 원하는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대피소에서 대충 짐을 정리하고 취사장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대피소에서 먹는 불고기 맛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맥주를 챙겨한 것 또한 신의 한 수였다. 노곤 노곤한 몸을 풀어주는 데에는 역시 고기에 맥주만큼 좋은 것이 없다.
대피소에서는 한 평짜리 공간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 잠자리가 예민한 나로서는 당연히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코를 고는 사람, 밤새도록 화장실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 새벽부터 일어나서 수다를 떠는 사람들까지 정말 힘든 밤을 보냈다. 되도록 대피소는 오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또 다른 느낌의 설국
구름 하나 없었던 전날 날씨와는 달리 다음날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반짝이던 눈꽃과는 또 다른 느낌의 설국이 눈앞에 있었다. 다음날은 어제와는 다른 코스로 트레킹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하늘이 닫혀있으면 능선 위에 올라서도 아무것도 볼 수가 없기에 다시 향적봉 쪽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전날과는 달리 구름에 갇힌 설천봉 모습. 화이트 아웃이 되어 10미터 이상 앞을 볼 수가 없다. 전날 맑은 하늘이 얼마나 고마운 날씨였는지 새삼 깨닫는다.
마지막 눈꽃 터널을 끝으로 이번 산행도 아쉽게 마무리했다. 날씨와 시간, 적절한 기온까지 삼박자가 맞아야 아름다답게 핀 눈꽃을 볼 수 있기에 이번 산행은 정말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1년을 기다려야 다시 만날 수 있는 눈꽃이지만 절정의 눈꽃을 가슴에 담아서 올 겨울을 잘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LNT : Leave No T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