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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시월 Aug 11. 2021

예술과 사랑에서 영원이라는 것

서울리뷰 | 영화 <콜드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려 한다면 '냉전시대, 공산주의 치하의 폴란드에서 첫눈에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의 만남과 사랑, 헤어짐.'이라는 상투적인 러브스토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콜드워>는 이 영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 위해 생략된 인물의 감정, 정체성, 절망이 전부라고 할만한 작품이다.

 태어남에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는 모든 인간의 삶 또한 큰 이야기의 얼개로 보면 상투적이다. 하지만 각자의 인생을 가장 버거워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안다. 어느 누구의 삶도 같지 않음을 말이다.

 영화는 공산주의 정부의 명령을 받고 민중음악을 선보일 악단을 발굴하는 빅토르의 시골 여행으로 시작된다. 여행의 끝에서 그는 누가 봐도 '산악지대에서 자란 순진한 여자'라는 캐스팅 지침에는 맞지 않는 줄라를 만난다. 줄라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자다. 그 사랑이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건, 노래와 춤에 대한 사랑이건 간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의 배경에는 노래와 춤, 젊은 예술가들이 가득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공산주의에 영합하려는 시류와 그에 반발하는 예술가의 대립으로 언제나 긴장감이 흐른다.

빅토르는 시류에 영합하고 싶지도 않지만 드러내 놓고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줄라와 함께 폴란드를 탈출하기를 꿈꾼다. 베를린에서 마침내 줄라와 탈출하기로 하는데, 그녀는 오지 않고 그는 혼자 떠난다.

 그 후 파리에서 재회한 줄라는 그에게 실패할 것이 두려웠다고 말한다. 줄라가 말하는 실패는 탈출의 실패가 아니다. 두 사람이 짧은 재회를 끝으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가 드디어 파리에서 함께 살게 되었을 때의 갈등이 줄라가 두려워했던 실패다. 함께 폴란드를 탈출하자는 빅토르에게 줄리가 했던 '내가 파리에 가서 뭘 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 그 두려움을 나타낸다.



 파리의 예술가 사회에서 자리 잡은 빅토르는 줄라를 위해 그녀를 그곳에서 가수로 성공하게 해주려고 한다. 하지만 줄라는 빅토르에게 비협조적이다. 어째서일까? 줄라는 타고난 가수이며 무대를 사랑한다. 그게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무대이더라도 자신을 필요로 하면 계속해나가는 가수다. 그런 줄라가 파리로 온 건 사랑도 이유겠지만 원하는 무대에 설 자유를 위해서였을텐데.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빅토르다.

 

 폴란드에서와 달리 빅토르는 파리 예술가 사회의 시류에 영합하는데 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줄라가 사랑한 남자는 올곧게 음악만을 보던 남자다. 그의 변화에는 물론 이유가 있다. 망명한 폴란드인 음악가라는 처지에서 꼭 필요했던 생존, 공산주의 사회에서와 결은 다르지만 여전한 고립감, 사랑했던 줄라의 배신-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두 사람이 생각하는 사랑이 다른만큼 줄라의 입장은 다르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예술과 동의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예술가로 살아남으려던 줄라는 그를 롤모델로 봤던 것 같다. 그는 악단과 민중가요, 줄라를 발굴해냈지만 그들을 포기했다. 줄라가 파리에서 그에게 실망한 건 악단과 줄라를 포기하면서까지 그가 찾아간 예술의 자유가 고작 스스로를 팔아넘기기 위해 매진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정부가 예술가들을 팔아 이념을 세우기를 원했던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예술가들 스스로가 성공을 위해 자신을 팔아넘겨야 한다.
 줄라는 파리를 떠날 때 그에게 함께 가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를 되돌리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그를 잘못 생각했었다고 한다. 사랑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예술가들의 사랑을 얘기한 또 다른 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처럼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예술, 자신의 성공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빅토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줄라와 폴란드에 돌아간다. 줄라는 그를 보며 그녀의 마음속에서도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줄라는 그를 구해내기 위해 자신을 소진시킨다. 그동안 그는 그의 음악을 잃고, 줄라는 그녀의 음악을 잃는다. 그렇게 서로를 소진시킨 후에야 두 사람은 함께 하기를 신 앞에 서약한다. 어떤 사랑은 함께 해도 불행하고 함께 하지 않으면 더 불행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대저택에으로 가는 두 갈래길을 이 연인의 마지막 순간에 다시 보게 하는 배치는 명징한 비유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모두가 다른 것을 보게 되는 건 당연하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니 사랑하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외롭게 하며 소진시키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사랑과 예술은 닮았다.

 

 사랑에 있어 영원이라는 것, 예술에 있어 영원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폴란드에서 줄라가 강물에 누워 얼굴만 내놓고 노래를 부르던 장면이 떠오른다. 강물이 시대를 상징한다면, 그에 잠식되지 않고 백조처럼 수면 아래에서 바쁘게 팔다리를 저으며 부르는 노래가 사랑이고, 예술일 것이다. 전체 인생에서 노래를 부르는 시간은 길지 않다. 그러니 사랑이든 예술이든, 영원히 변치 않기를 원한다면 흐르기를 멈춰  순간에 스스로 박제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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