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회중년생 Jun 20. 2024

Venezia : 부활절엔 메스트레 산책을

4월 9일 (9일차)

어차피 오늘은 쉬어 갈 생각이었다. 바포레토 3일 이용권이 어제 저녁부로 만료되었기도 하고, 그동안 매일 본섬에 들어가 관광하느라 정작 우리가 묵는 숙소 주변이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기 때문에 슬렁슬렁 메스트레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마침 오늘이 부활절(Pasqua) 당일, 내일은 부활절 후 월요일(Pasquetta)이 아닌가? 이탈리아의 부활절엔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고 거리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치일 정도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났다. 우리는 둘 다 그런 날은 오히려 피하자는 주의라 잘 됐다고 생각하며 아침도 거르고 10시쯤 느지막이 호텔을 나섰다.


(2023년 4월 9일 일요일)

호텔 복도에서 청소하시는 직원 분들의 분주한 도구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아마 점심때까지 침대 위에 눌러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권과 유로화(오늘 쓸 돈을 제외한) 등 중요물품을 미니금고에 넣어두고는, 객실 복도 편 손잡이에 방 청소를 부탁한다는 종이 팻말을 걸어둔 후 로비로 내려갔다. 일단 기본 목적지는 지도상으로 봤을 때, 호텔에서 북쪽으로 쭉 걸어가다가 오른편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는 메스트레 시내였다. 기본 지식이 전혀 없는 우리는 거기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가보고 그다음을 결정하기로 했다. 특별한 무언가를 하고 싶은 날이 아니었으니, 적당한 카페에 자리 잡고 천천히 쉬다가 돌아와도 전혀 상관없었다.

메스트레 시내로 걸어가는 길은 고요했다. ‘과연 지금 이 시각 본섬에는 듣던 대로 사람이 많을까?’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이쪽은 적막했다. 문 닫은 상점들 사이를 가득 채운 건 밝은 햇살과 흔들리는 나뭇잎의 그림자뿐이었다. 거의 매일 다녔던 호텔 근처를 벗어나 낯선 길을 조금 걸으니 건조하고 높은 벽이 나타났다. 벽은 한 블록 정도 이어졌는데 안의 공간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높게 쌓은 모양이었다. 입구로 보이는 곳에 빨간색 통행금지 표시와 함께 군사 구역이라는 문구가 또렷이 적혀 있었다. 군사 구역 건너편 길 담벼락에는 콘서트인지 미술전인지 모를 여러 종류의 포스터가 세줄로 쭉 이어져 붙어있었다. 한 20~30분 정도 걸었을까? 지도에서 봤던 시내 입구로 들어섰다. “여기 맞아?”, “어, 분명히 여긴데?” 사회와 중년생이 의아했던 이유는 스마트폰의 지도 위치상으로 시내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너무 한산했기 때문이었다. 가게마다 굳게 닫힌 철문과 그 위에 칠해진 그래피티들. 대부분의 상점들이 쉰다는 부활절인 것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뭔가 썰렁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몇몇 가게 외부 유리에 비슷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녹색 페인트로 대나무 줄기가 그려져 있고 옆에 Sfitto라는 글자와 알 수 없는 숫자가 적혀 있었는데, 그런 가게들은 유리창 너머로 한눈에 봐도 빈 점포였다. Sfitto를 이탈리아어 사전에서 검색해 보니 역시 [방이 빈, 텅 빈 거주할(빌릴, 임대할) 사람이 없는]의 뜻을 가진 단어였다. 그렇다면 빈 점포라는 건 알겠는데 왜 대나무 그림을 그려놨을지가 의문이었다.

의문의 대나무 그림이 그려진 빈 점포들

궁금한 것을 못 참는 성격인 두 사람의 검색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발견된 기사 하나. 번역해서 읽어보니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베니스의 빈 상점에 생기를 불어넣는 대나무 디자인: Freak of Nature의 예술

치솟는 임대료로 인해 문을 닫은 빈 상점의 문제는 오늘날 팬데믹으로 인한 위기와 맞물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사로잡는 큰 문제입니다. 밀라노 출신의 예술가 Freak of Nature는 이렇게 빈 상점의 유리를 예술 작품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고 포기가 시작되는 곳에 다시 식물이 자라게 함으로써 생명력을 되찾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리고 인간처럼 끈질긴 적응력으로 장수하는 식물인 대나무를 선택하여 표현했습니다. (미천한 언어능력으로 상당한 오역 및 의역이 있을 수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축제의 도시 베네치아에 비어있는 상점이라니. 우리는 씁쓸한 마음을 안고 좀 더 시내로 깊숙이 들어가 보기로 했다. 중심으로 보이는 광장(Piazza Erminio Ferretto) 하나가 나타났다. 한가운데 크진 않지만 정갈하고 세련된 분수와 연못이 있고,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잘 정돈된 상점들. 부활절이 아니었다면 분명 활기찬 번화가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자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분수 주위에는 아침 햇살을 즐기러 나온 현지인 가족들로 붐볐다. 아이들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꺅- 소리를 내며 분수 주위를 뛰어다녔고, 저 멀리 광장 끝 부분에서는 한 버스커의 연주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얼마간 연주를 감상하다가 1유로를 버스커 앞 상자에 넣고는(자발적인 감상료) 광장을 벗어나 다른 길로 걸어 들어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떤 건물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복장만 봐도 일요일 아침 예배를 드리고 나온 느낌이 선명했다. 인파가 빠져나간 건물은 다름 아닌 성당이었다. 부활절 미사가 끝난 모양이었다.

또 다른 골목에서는 문을 연 상점이 딱 하나 있었는데 운동화 상점이었다. 나이키와 아디다스, 리복, 뉴발란스, 푸마, 카파 등 다양한 브랜드 운동화가 즐비한 리셀 편집샵인 모양이었다. 한국에서도 있을 법한, 특별할 것 없는 나른하고 평범한 휴일 오전 풍경들인데도 여행자의 시선으로 보니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원래 광장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좌측으로 난 큰길로 들어가 보았다. 한눈에 봐도 고급 상점가였다. 각종 명품 브랜드들의 간판이 좌우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전부 문을 닫아 아쉬웠지만 괜찮았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쉬기 좋은 똘똘한 커피숍 하나뿐이었으니까. 잘 정돈된 닫힌 상점들 사이를 돌아다니다 보니 마치 문을 열기 전 놀이동산에 일찍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여기는 마치 놀이동산 동화마을 (feat. 깨끗한 바닥, 드문 인적, 닫힌 상점)

“이제 슬슬?” 사회가 운을 띄었다. “다리도 아픈데 커피숍을 찾아볼까?” 중년생이 이어서 문장을 완성했다. 우리의 선택은 길 모퉁이에 있는 한 커피 바였다. 가게도 넓어 보였지만 햇살 좋은 아침이라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잠시 후 중국계로 보이는 직원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꼬르네또 두 개와 카푸치노 두 잔을 주문했는데(6.4유로) 너무 친절하시고 사랑스러우신 분이었다. 처음 와본 동네에 대한 긴장감이 다 사라졌을 정도로.

한 가지 재미있었던 점은 한국을 잘 모르겠다고 하시길래 그럼 BTS는 아시냐고 물어봤더니 잘 안다고 하시며 너무도 해맑은 표정을 지으셨다. 꾸밈없는 미소를 보니 정말 팬이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주문한 카푸치노와 꼬르네또를 먹으며 꿀 같은 휴식을 즐겼다. 이 카페에는 어제 마신 일리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 브랜드가 적혀있었는데, Julius Meinl라는 처음 보는 이름으로 역시 검색을 통해 알아보았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회사로서 커피를 비롯한 고급 식품과 식료품을 제조 및 판매하고 있었고, 사명은 설립자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했다. 이 브랜드가 우리 입맛에 잘 맞아선지, 아니면 휴일 오전이 여유로워서인지, 햇살 때문인지, 더해진 친절 한 스푼 때문인지는 몰라도 커피와 빵 모두 정말 맛있었다. 또다시 행복해져 버렸다.

커피 + 빵 + 야외 + 휴식 = 꿀

얼마나 쉬었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주위에 닫혀 있었던 푸드트럭들이 하나 둘 오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12시가 머지않음이 틀림없었다. 사회와 중년생도 슬슬 배가 고파왔다. 하지만 아직 다들 준비 중일 뿐 특별히 주변에 연 식당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열 때를 기다렸다가 끼니를 해결해도 되지만 마냥 밖에만 있기엔 피곤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다? 잠시 고민하다 둘은 묵는 호텔 건너편의 중식당을 생각해 냈다. 항상 사람들이 줄 서 있는 식당. 궁금했었는데 돌아가는 길에 들러서 포장하기로 했다. 호텔로 가져가 점심을 먹고 좀 쉬다가 다시 나오는 것으로 계획 변경. 목적지가 뚜렷하니 가는 길은 수월했다.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 가게 밖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중국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중년생이 눈치를 보더니 가게 안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물어봤다. 포장이면 지금 바로 주문하고 좀 기다리면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선택한 원저우차오판(온주식 볶음밥), 위샹로우쓰(어향소스 고기채볶음), 티에판치에즈(철판 가지요리) 세 가지에 17유로. 이탈리아, 그것도 베네치아 물가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게 저렴한 금액이었다. 세 가지 요리가 저 가격이라니. 플라스틱 용기에 깔끔하게 포장된 음식을 종이봉투에 담아 젓가락과 수저까지 챙겨서 호텔로 돌아왔다. 뚜껑을 열기도 전에 중국 요리 특유의 진득한 기름 냄새가 방 안에 진동했다. 그 몇 초 사이에 사회와 중년생은 침이 고이다 못해 흐를 지경이 되었다. 드디어 뚜껑 오픈! 식사 시간은 10분이나 되었을까? 정말 정신없이 먹어치웠다. 배고파서도 있지만 맛이 일품이었다.

배고플 땐 당연히, 안 배고팠을 때도 맛있을 중식 삼총사

중국 유학 시절에 수많은 현지 음식을 먹어 본 중년생도 양손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아, 행복해!” 사회가 대꾸했다. “이탈리아 와서 행복하다는 소리 자주 하네. 좋다!” 사실이었다. 오기 전까지는 모든 게 힘들었는데 그랬던 일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과감한 단절을 선택한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감사했다.

그러고 보니 식사를 마치기 전 까지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배가 차고 시야가 넓어지자 두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미니 금고가 활짝 열려 있었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테이블 위에 동그란 알 모양의 초콜릿 두 개가 놓여 있었다는 점이었다. 열린 금고에 마음이 몹시 두근거렸지만 다행히 없어진 것은 없었다. 만약 누가 들어와 금고를 연 것이라면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 우리의 실수가 분명했다. 아침 내내 빈둥거리다 나갈 때만 급해져서 여권과 돈을 금고에 넣고 잠그는 것을 깜빡 한 모양이었다. 깨끗하게 청소된 방에는 물건이 사라지기는커녕 직원의 상냥함이 담긴 부활절 초콜릿 두 개가 더해져 있을 뿐이었다. 친절한 서비스와 배려에 두근거렸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따뜻해졌다. 초콜릿에는 포춘쿠키처럼 한 개 당 한 문장씩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문제 해결법을 찾게 될 겁니다.’와 ‘가슴 두근거리는 만남이 있을 겁니다.’였다.(오역이 있을 수도 있다고 미리 오리발을 내밀어 본다.) 억지로 엮어보자면 맞는 말이었다. 다른 의미겠지만 금고가 열려 있는 가슴 두근거리는 만남이 실제로 있었고, 청렴한(?) 직원 덕분에 무사히 해결까지 되었으니까.

부활절 초콜렛과 행운의 메세지 (캄사합니다, 청렴하고 친절한 직원분!)

우리는 몸도 마음도 충전 완료되어 다시 메스트레 산책을 이어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호텔 동쪽 편에 있는 공원(Parco Piraghetto)을 찾아갔다. 사면이 그래피티로 가득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어찌 보면 정리 정돈이 덜 되어 다소 거친 느낌이 드는 곳이었지만, 그와는 대비되는 푸른 녹지와 연못, 분수까지 갖출 것은 다 갖춘 편안한 동네 공원이었다. 아이들도 많이 뛰어놀고 어르신들도 많았다. 연못멍, 분수멍을 하며 충분히 일광욕을 즐기다 못해 지루해졌을 즈음, 시간을 보니 오후 5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연못멍, 분수멍, 나무멍, 잔디멍, 심지어는 그래피티멍까지 가능한 동네 공원

“호텔 근처로 슬슬 걸어갈까?” 중년생의 제안에 두 사람은 현지인처럼 여유란 여유는 다 부리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있다가 저녁은 어떻게 할까?” 두 사람 다 오늘도 마트에서 장을 봐서 먹기는 싫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눈앞에 피자를 파는 레스토랑이 보였다. “피자나 포장해서 먹을까?”, “좋아, 일단 앉아서 에스프레소부터 한 잔 하자!” 테라스 자리에 털썩 앉으며 사회가 대답했다. 신기하게도 이탈리아에서는 에스프레소부터 카푸치노까지 한국에 비해 양이 적어서 인지, 아니면 맛있어서 인지 하루에 커피를 두 세잔은 먹게 되는 것 같았다. 일전에도 언급했지만 가게마다 취급하는 커피가 다르다는 점도 우리의 도전의식을 자극하는데 한몫했지 싶다. 이곳에는 ‘Bristot’이라고 적혀 있었다. 윗부분은 사각, 아랫부분은 원통형인 특이하고 예쁜 에스프레소 잔에 담겨 나온 진하고 고소한 커피를 마시며 역시 검색창을 켰다. 소개 페이지의 첫 문장은 이랬다. ‘돌로미티의 맑은 공기 속에서 100년 이상 열정으로 로스팅한 커피입니다.’ 살펴보니 1919년에 탄생한, 요즘 핫한 이탈리아의 알프스인 돌로미티(Dolomiti) 지역의 커피 브랜드였다. 새로운 커피 지식이 +1 되는 순간이었다.

특이하고 예쁜 잔만큼 맛도 인상적이었던 bristot 에스프레소 (잔 사올걸 그랬다)

이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나무랄 데 없이 정말 좋은 하루였는데 이후 사회와 중년생은 잠깐의 위기를 맞게 된다. 다름 아닌 피자 주문. 테이크아웃 할 요량으로 중년생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 메뉴판을 달라고 했는데, 달라는 메뉴판은 주지 않고 칠판에 쓰여 있는 곳을 가리키며 어떤 것을 포장하려고 하느냐 물었다. 어차피 커피를 마시는 동안 검색으로 메뉴를 대충 알고 들어온 중년생이었기에 살라미 피자 작은 사이즈 한 판을 주문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작은 사이즈는 없으니 옆 문을 열고 가서 거기서 주문하시오.’였다. 분명히 사이즈가 작은 거, 큰 거로 나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들어온 터라 살짝 의아했으나, 일단은 직원의 안내대로 옆 문을 열고 들어가 보기로 했다. 문 너머는 조각 피자를 파는 곳이었고 심지어 중년생이 원했던 살라미 피자는 있지도 않았다. 중년생은 순간 불쾌해져 다시 레스토랑으로 돌아가서 직원에게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영어를 서로 잘 못해서인지 결국 원하는 피자는 주문하지 못했다. 지금도 불친절해서라고는 믿고 싶지 않지만, 친절한 이탈리아에서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불쾌한 기분이 든 순간이었다. 그곳의 피자가 꼭 먹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고, 대화를 이어가 봐야 기분만 더 상할 것 같아서 중년생은 사회와 함께 커피값만 계산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대신 향한 곳은 한 번 가본 적 있고 좋은 기억이 있는 메스트레 역 안의 조각피자집이었다. 입맛은 싹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녁을 굶기는 싫었으니까. 하지만 저녁의 운이 따로 적용되기라도 하는지, 여기도 오늘은 순탄치 않았다. 피자 큰 조각 두 개(9.4유로)를 주문하려고 줄을 섰는데 바로 앞의 한 관광객이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직원이 엄청 불친절하고 힘든 표정으로 안된다고 툴툴대며 응대하는 상황이었는데, 관광객은 전혀 개의치 않고 피자를 잘게 잘라달라는 요구를 될 때까지 반복했다. 며칠 전에 왔을 때 있었던 직원은 정말 친절했었는데, 오늘의 직원은 정말 이마에 ‘나 일하기 싫어.’라고 쓰여있는 스타일이었다. 우리 같으면 관광객 입장인 데다 언어도 잘 통하지 않으니, 괜히 위축돼서 한 번 거절당하면 더 요구하지도 못했을 텐데 그 관광객은 대단했다. 전혀 화를 내지도 않으면서도 끝까지 요청해서 결국 피자를 잘게 잘라서 받아냈다. 뭔가 우리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면, 화를 내지 않는 선에서 당당하게 요구해야겠다는 결심까지 드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눈으로 그 관광객에게 리스펙을 보냈고, 우리의 피자를 받아 포장해서 호텔로 돌아왔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던가? 오늘의 피자는 직원의 응대만큼이나 형편없었다. 식고 메말라 있었다. 같은 브랜드, 같은 지점의 피자인데도 직원에 따라 이렇게나 차이가 나다니. 앞으로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씻고 쉬면서, 그동안 겪었던 이탈리아와 앞으로 겪어야 할 이탈리아에 대해서 쉴 새 없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늘 있었던 에피소드는 물론, 내일은 또 무엇을 할지도 전혀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화 거리는 끝이 없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넘어선, 즉흥적인 여행이 주는 더 큰 기대감이 우리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아마 두 피자집 직원들의 귀도 밤새 끝없이 가렵지 않았을까 싶은 밤, 아니 이미 새벽의 한복판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